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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NIKKI

230614_사랑의 메커니즘 2 (※오남용 주의)

by 조토삼 2023. 9. 7.

랑또 작가의 만화를 좋아했다(과거 시제를 쓴 이유는 단순히 그의 근작을 보지 않아서다). 요즘은 웹툰을 보지 않지만 한창 보던 시절에 그의 《악당의 사정》과 《SM 플레이어》를 재밌게 봤더랬다.

몇 년 전 우연히 그가 《가담항설》이란 신작을 연재 중이란 걸 알게 됐고, 반가움에 최신화를 읽어 봤다. 신작이라 말하기 민망하게도 전개는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듯했고, 인물-사건-배경 중 무엇 하나 아는 게 없으니 "요즘은 이런 걸 그리는구나" 하고 스크롤만 내리던 차에, 대사 하나에 눈이 꽂히고 말았다:

몇 화였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클라우드에 저장해 뒀더라


 
이영도 작가의 소설을 좋아한다(현재 시제를 쓴 이유는 그의 근작까지 즐겁게 읽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집에 내려갔다가 책장에 꽂힌 《마트 이야기》를 발견하곤 다시 읽어봤다.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등장인물의 언행으로 보여주는, 특유의 매력적인 세계관에 금세 빠져들었다.

이 책에는 '시하와 칸타의 장'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데 각각 '○시 하수 처리장'과 카페 '칸타타'에서 따온 주인공들의 이름이다(이 얼마나 하드보일드한 작명인가). 이들 소년소녀는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환상적인' 존재들에게 대충 망해버린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난세에는 영웅이 출현하는 법, 소년 칸타는 인류 부흥의 기치를 든 영웅 마트 퀸의 휘하로 가기로 하고, 이를 헛된 희망 고문이라 여기는 소녀 시하는 사랑하는 칸타를 말리고 싶다. 그래서 때마침 나타난 요정 데르긴에게서 입수한 사랑의 묘약을 이용하고자 한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맞이한 최후의 순간, 시하가 사랑의 묘약을 사용하고 난 뒤 이어진 사랑 고백이 또 인상적이었다:

난 너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해.

 


폭력은 나쁜 것이라고 믿는다. 어떤 폭력이 더 나쁘거나 덜 나쁜 것은 아니라고도 생각한다. 다만 어떤 폭력이 더 위험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이 특히 그러하다. 우리는 이런 폭력을 친구와 연인 사이에서, 그리고 가족 사이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처럼 나를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나를 가장 괴롭게 하는 역설을 보고 있노라면, "사랑한다"는 말이 실은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너로 남아달라"는 뜻은 아니었을지 의심스럽다. 14세기의 인사말 "God be with ye"(신이 당신과 함께하기를)가 "Good bye"가 됐듯이, 《마트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당신이 나와 이 세계를 떠나도 이 세계와 나는 당신이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언제까지나 당신을 기다릴 것이다”라는 의미에서) "세이브(Save)"라고 작별 인사를 주고받듯이, 우리는 말의 원형은 잊고 그 껍데기만 주고받고 있는 거지.

위에서 소개한 두 작품 속 대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듯해 위안이 된다. 사랑도 다른 모든 관계와 마찬가지로 존중에 기초해야 하고, 그러지 못한 사랑은 결국 폭력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당신에 대한 존중은 실은 나에 대한 존중과 다르지 않아서, 당신을 올바르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