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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존재하지 않는다(2024)_하마구치 류스케 도입부가 상당히 길다. 자연과 어우러진 하라사와라는 마을의 겨울 풍광과 주민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사건'의 발단은 그 뒤, 마을에 글램핑장을 짓기로 한 도쿄의 연예 기획사가 주최한 주민 간담회라고 봐야 할 것이다. 도쿄와 시골이라니, 세상 물정 모르는 시골 주민들을 구워삶는 영악한 도시 사람들의 모습이 얼른 떠오르지만, 천만에. 주민들은 저마다 차분하게 기안의 맹점을 지적하고, 쩔쩔매는 실무자들에게 (화를 쏟아내는 대신) 책임자를 동반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 기획사 직원 마유즈미의 말마따나 "주민들은 바보가 아니"다. 회사 측도 마찬가지, 연예 기획사가 팔자에도 없는 글램핑장 사업을 벌인 것부터가 정부로부터 코로나 지원금을 타기 위해서였다. 마을 사정에 해박한 타쿠미라는 주민에게 좋은 술이라도 사들고.. 2024. 4. 8.
조용한 이주(2023)_말레네 최 한국에선 만나기 어려운 덴마크 영화다. 한국계 입양아인 감독이 한국계 입양아를 주연으로 한국계 입양아가 주인공인 영화를 찍었다.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낱말이 있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원래는 파종播種, 즉 씨뿌리기를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여기서 파생한 "(본래 살던 땅에서) 흩어진 사람들"이란 뜻으로 쓰인다. 칼은 아주 어려서 덴마크에 입양돼 자랐지만, 그 출신(과 이를 드러내는 겉모습) 탓에 여전히 그 사회에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는 자연히 그가 태어난 곳, 한국에 끌린다. 떠나와 자리 잡은 곳에서 제자릴 찾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의 이야기니까, 이 영화도 마땅히 디아스포라 이야기라 할 만하겠다. 영화는 간단한 연출로 칼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보.. 2024. 4. 4.
패스트 라이브즈(2023)_셀린 송 영화를 보기 전까진 제목이 fast lives인 줄 알았다. 영화를 보다 보니 past lives, 그러니까 전생이더라. 작중에선 한국계 미국인 노라가 훗날 남편이 되는 유대계 미국인 아서에게 '인연'이란 개념을 설명하며 처음 언급된다. 인연을 옮길 만한 영어 단어가 없다고 여겼는지, 노라는 인연을 그대로 "인연"이라 발음한다. 줄거리는 이렇다. 서로의 첫사랑이었던 나영과 해성은 나영이 부모님을 따라 캐나다로 이민하면서 헤어진다. 10여 년이 지나 뉴욕에서 홀로서기를 시작한 나영이 우연히 해성이 인터넷에서 자기를 찾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둘은 다시 연락을 시작한다. 둘의 감정은 점점 커져가지만 물리적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결국 나영이 극작가로서의 커리어에 집중하기 위해 시간을 갖자고 말하면서…… 다시 .. 2024. 3. 18.
이처럼 사소한 것들_클레어 키건 도서 검색대가 따로 없는 서점에서 일하다 보면 어떤 책이 있는지 묻는 손님들을 하루에도 몇 사람씩 만나게 된다. 보통은 작가 이름이나 책 제목을 대며 그(의) 책이 있는지 묻는데, 어느 쪽도 정확히 모르고 오는 분들도 종종 있다. 어느 날엔 "요즘 나온, 금발에 젊은 서양 여자가 쓴 책"을 찾는 분이 있었다. 마침 책 날개의 작가 사진이 떠올라서, 혹시 그 사람을 말하는 건가 하고 클레어 키건의 책으로 안내해드렸더니 맞았다(아무래도 이상해서 손님이 떠난 뒤 검색해 보니, 68년생이더라). 충분하지 못한 단서만으로 클레어 키건을 떠올릴 수 있었던 건 물론 나도 그의 작품에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계기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내가 좋아하는 배우를 주연으로 영화화된다는 소식이었다. 더구나 책 띠지엔 추천.. 2024. 3.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