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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NIKKI

231119_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한남동

by 조토삼 2023. 11. 21.

서울에서만 10년 가까이 살았는데 아직도 잘 모르는 동네가 많다. 이게 다 경로의존성이 커서, 그러니까 가던 데만 가서 그렇다. 주로 범汎홍대권―연남, 합정, 망원, 상수 등―만 다니다 보니 강남만 해도 여전히 낯설다. 새해도 가까워오겠다, 새삼 새로운 곳을 개척해 보고 싶어졌다. 새롭다곤 해도 내 입장에서나 새롭지, 남들 입장에선 단물이 다 빠진 동네여야 했다.

남들 일할 때 놀 수 있어서 백수 신분과 주말 근무가 나쁘지 않았을 정도로 붐비는 공간을 싫어한다. '핫한' 곳을 피한다는 점에선 (이른바) 홍대병과 증상이 일치하지만, 홍대병이 "남들 다 가니까 난 싫어!" 하고 신대륙을 찾아 떠난다면, 내 쪽은 "남들 다 가니까 난 싫어…" 하고 피안彼岸을 찾아 떠돈다.

요즘은 성수 쪽이 핫하다기에 이태원을 골랐다. 접근성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지만) 좋고, 주말 저녁 시간대만 피하면 사람에 치이지도 않을 것 같았다.


이태원에는 현대카드에서 운영하는 문화 시설들이 있다. 현대카드 아트 라이브러리와 뮤직 라이브러리가 큰길가에 나란히 있는데, 전자는 LP 파는 곳이고 후자는 LP 듣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나는 그러기로 했다). 현대카드가 수상할 정도로 음악에 진심이라는 건 연말 슈퍼콘서트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들 시설도 그 일환일까?

https://kko.to/HHEA4fX7gb

 

현대카드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246

map.kakao.com

이태원역과 한강진역 중간쯤에 위치해 있는데 한강진역 쪽이 좀 더 가깝다. 어느 역이든 3번 출구로 나와 큰길 따라 쭉 걸으면 된다.

12시 오픈에 맞춰 마수걸이로 입장했다. 1층 접수처에서 현대카드를 보여주면 출입증을 준다. 한 사람까지는 동반 입장도 가능한 것 같았다. 2층으로 올라가 직원의 안내를 받았다.

출입증 한 장에 LP는 세 장씩, 골라서 카운터로 가면 자리를 배정해 주는 식이었다. 제한 시간은 30분. 음반은 구석의 아이패드에서 검색할 수 있었는데, 미리 생각해두고 간 게 아니라 그냥 보이는 대로 골랐다. 의외로 최근 음반들도 있었다; 잔나비라든지.

 

첫 번째는 콜드 플레이의 첫 앨범, 《Parachutes》(2000). 아는 노래가 없어 〈Yellow〉만 들었다. 유튜브로도 여러 번 들어서 익숙한 멜로디인데도 LP 특유의 자글거리는 노이즈가 감성을 더했다. 〈Fix You〉나 〈Everglow〉도 LP로 듣고 싶어졌다.

이건 또 인물 사진으로 찍었네

두 번째는 그린 데이의 《American Idiot》(2004). 고삼 때 한창 입시에 힘들어하던 친구가 위로가 되더라며 추천했던 〈Good Riddance (Time of Your Life)〉 덕에 알게 된 밴드였다. 〈American Idiot〉 , 〈Boulevard of Broken Dreams〉,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를 연달아 들었다.

세 번째는 보자마자 참지 못하고 집어든 전람회. 영화 〈건축학 개론〉으로 우리 세대에게도 재조명된 〈기억의 습작〉이 수록된 첫 앨범 《Exhibition》(1994)을 듣고 싶었다. 음반 자체가 더 오래된 것이어선지 제조나 관리상의 문제인지, 자글거리는 노이즈가 앞선 두 음반보다 심했다. 그러다 김동률 씨의 앳된 목소리가 더해지자, 그마저도 배경음으로 어우러지는 것 같았다.

그린 데이를 너무 오래 들었을까, 도입부가 막 끝날 즈음 30분을 알리는 진동벨이 울렸다. 대기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마저 듣겠다고 버텼던들 끌어내기야 했겠느냐마는, 끝까지 듣고 앉았을 만큼 뻔뻔하지도 못해서 우리는 일어났다. 다른 날 다른 자리에서 또 들을 기회가 있을 거라 믿자.


뮤직 라이브러리 바로 옆엔 아트 라이브러리가 있었다. 앞서 소개한 대로 LP를 살 수 있는 곳이었다. 이런저런 음반들이 분류별로 진열돼 있었는데, 개중 일렉트로닉 음반이 유독 튀었다. LP로 듣는 일렉트로닉 음악이라니, 상상이 잘 가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실은 아까 직접 들으면서도 콜드 플레이나 그린 데이보다는 전람회 쪽이 LP라는 매체와 더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오래된 팝이나 락이었다면 또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시대와 (그 시대에 유행하는) 장르에 어울리는 매체가 따로 있는 것 같다는 느낌. 성경 말씀대로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거겠지. 하긴, 어디 음반뿐이랴.

커트 보니것의 말을 빌린다면, "as it goes." 원래 그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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