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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다

드라이브 마이 카(2021)_하마구치 류스케

by 조토삼 2023. 6. 3.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동명의 단편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같은 단편집(《여자 없는 남자들》)의 다른 수록작 두 편(〈셰에라자드〉, 〈기노〉)도 일부 차용한바 감독이 서로 다른 세 편의 소설을 어떻게―얼마나 잘―접붙였는지 살피는 것도 즐거울 것이다.

제목에서 보듯 서사의 큰 줄기는 〈드라이브 마이 카〉를 따라 아내를 잃은 중년의 연극 배우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 분)가 젊은 여자 미사키(미우라 토코 분)에게 운전을 맡기면서 시작한다. 여기에 감독은 앞서 언급한 두 작품으로 가후쿠와 그 아내 오토(키리시마 레이카 분)의 서사를 채우고, 히로시마 연극제라는 상황적 배경을 더한다.


아내 오토에게는 기벽이 하나 있는데 바로 잠자리 후 트랜스 상태에 빠져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이다(〈셰에라자드〉). 가후쿠는 드라마 작가인 아내를 위해 그 이야기를 들어뒀다가 다음 날 도로 들려주곤 한다. 영화의 도입부도 오토가 들려주는, 짝사랑하는 동급생의 집에 숨어드는 여학생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이야기에는 살이 붙는다. 여학생은 바위에 붙어 해초처럼 흐느적대는 칠성장어였던 전생을 기억하고 있고, 숨어든 빈집에서 칠성장어일 적의 아늑함을 느끼곤 자위를 하다가 누군가 집에 들어온 것을 깨닫는다…….

가후쿠는 그 뒷이야기를 듣지 못한다.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 아내 오토가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이들 부부에게도 어둠은 있다. 십수 년 전 둘은 네 살짜리 딸을 폐렴으로 잃었고, 아내 오토는 자기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출장을 떠났다가 일정에 차질이 생겨 돌아온 가후쿠는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하지만 곧장 돌아선다(〈기노〉). 가후쿠는 함구하고 여느 때처럼 일상을 보낸다. 그리고 어느 날, 돌아오면 할 말이 있다는 아내를 두고 한참을 배회하다 돌아온 가후쿠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내를 발견한다.

가후쿠가 뒷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몇 년 뒤, 히로시마 연극제 준비 중에 아내의 내연남 다카쓰키(오카다 마사키 분)로부터다. 오토를 사랑했고 여전히 그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보이는 다카쓰키는 가후쿠에게 오토로부터 들었다며 뒷이야기를 전한다.

집에 들어온 것은 동급생의 가족이 아니라 다른 침입자였고, 그는 자위 중이던 여학생을 덮치려 든다. 저항하던 여학생은 침입자를 살해한 뒤 그 집을 벗어난다. 그러나 그 뒤로도 동급생도 동급생의 집도 여상하기만 하다. 현관에 CCTV가 새로 설치됐을 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고 웅변하는 듯한 CCTV 앞에서, 여학생은 몇 번이고 되뇐다. "내가 죽였어."


다카쓰키가 전한 이 뒷이야기는 세 편의 소설 어디에도 실리지 않은, 감독이 직접 쓴 것이다. 그러나 감독의 성실한 독해에 힘입어 하루키에게서 빌린 다른 모든 요소와 잘 어우러진다. 짐작건대 오토가 지어낸 이야기는 죽은 딸아이에 대한 죄의식과 무의식 중에 연결돼 있다. 그리고 이는 가후쿠의 죄와도 연결된다.

〈기노〉에서는 "옳지 않은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를 다룬다. (〈기노〉의 주인공인) 기노의 경우 이 부작위는 "상처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받지 않"은 것이다. 진실을 외면하고 텅 빈 마음을 떠안아버린 기노의 닮은꼴을 우리는 영화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남자와 함께하느라 아픔을 혼자 끌어안아야 했을 여자는 어땠을까. 딸아이를 잃고 사랑하는 남편마저 제 아픔으로부터 눈 돌리자 오토는 몇 번이고 되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죽였어."

서로 사랑하지만 오토의 내면에는 들여다볼 수 없는 어둠이 있었노라 털어놓는 가후쿠에게, 다카쓰키는 직접 물은 적은 없느냐고 묻는다. 오토를 잃을까 두려웠다고 답하는 가후쿠에게, 다카쓰키는 다시 한 번 묻는다. "오토 씨가 물어보길 원했을 가능성은요?" 이어서 (위의) 오토(音)의 이야기[音]를 전하는 다카쓰키의 얼굴은 울분에 차 있다. 진정으로 바라 마지않았을 테지만 자격이 없었던 그는 가후쿠의 죄를 대속할 수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내연 관계를 목도한 가후쿠가 〈바냐 아저씨〉 속 소냐의 마지막 대사를 새기며 "일"로 눈 돌린 것과 달리, 다카쓰키는 그러지도 못했다. 그는 당연한 수순처럼 파멸에 이른다.


영화의 막바지에 가후쿠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받아들이고 고백하게 만든 것은 연극 〈바냐 아저씨〉이고, 운전수 미사키와의 교감이다. 퇴장한 다카쓰키를 대신해 바냐를 맡게 되자 가후쿠는 미사키와 함께 미사키의 고향을 찾는다.

미사키는 가후쿠와 마찬가지로 제 어머니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있다. 두 사람은 얼마간 닮아있고 가후쿠와 오토의 딸아이가 살아있었다면 미사키와 같은 스물셋이었을 것이다. 이들 닮은꼴 유사 부녀는 서로를 위로하고 구원한다. 죄를 고백하는 미사키를 앞에 두고, 가후쿠 역시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나는 제대로 상처받았어야 했어. (…) 실은 깊은 상처를 받았지, 곧 미쳐버릴 정도로.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계속 못 본 척했어."

이 장면은 다분히 연극적으로 연출됨으로써 장장 세 시간짜리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가후쿠가 연출을 맡은 〈바냐 아저씨〉의 준비 과정과 맞물려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영화 초반에 가후쿠는 전 세계에서 모국어를 달리하는 배우들을 모집하고, 저마다 모국어로 연기하도록 요구한다. 배우들은 서로 상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에 교감은커녕 대사를 제때 주고받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다. 게다가 가후쿠는 대본 리딩 시에 철저히 감정을 배제하도록 지도하고, 배우들의 의구심과 불만에도 건조한 대본 리딩만을 반복한다. 그러다 어느 볕 좋은 날, 야외 연습 중에 중국어로 연기하는 옐레나와 한국 수어(手語)로 연기하는 소냐 사이에서 "뭔가가 일어"난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 여운에 젖어있을 때 가후쿠는 "아직 배우들 사이에서 일어났을 뿐"이라고, "관객에게 그걸 열어가"라고 요구한다.

다시 클라이맥스로 돌아와, 평소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가후쿠와 미사키는 이 장면에 이르러서야 날것 그대로 감정을 토해낸다. 함께하는 시간 동안 쌓여왔던 두 사람의 교감은 상승효과를 일으켜 관객에게까지 큰 울림을 전달한다. 두 사람은 삶이라는 연극의 어느 클라이맥스에서 우리에게 감동을 전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연극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화면은 소냐의 마지막 대사를 앞둔 〈바냐 아저씨〉의 무대 위로 이어진다. 소냐는 좌절한 바냐를 뒤에서 끌어안고, 그의 눈앞에서 한국 수어로 마지막 대사를 읊는다. 지난날 아내의 외도를 목도하고 마음을 죽이느라 되새겼던 대사는 이제 생에 대한 순수한 긍정과,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슬픔에도 불구하고 눈 돌리지 말고 살아가자는 위로와 격려가 된다.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 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도록 해요.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리고 아저씨와 나는 밝고 훌륭하고 꿈과 같은 삶을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드디어 우린 평온을 얻게 되겠지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열렬히 가슴 뜨겁게 믿어요. 그때가 오면 우린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재작년 크리스마스이브 밤에 이수역 아트나인에서 이 영화를 처음 봤다. 어떤 영화인지 알고 본 것은 아니었다. 세 시간짜리 영화라는 것도 보고난 다음에야―세 시간이 훌쩍 지난 것을 보고―알았다. 보는 내내 단 한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극장을 나서자마자 후기를 구상하기 시작했지만 쓰다가 날려먹는 바람에 그길로 의욕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미뤄둔 지 벌써 햇수로 3년째가 됐다. 그러다 얼마 전 우연한 기회로 이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었다. 보기 전에 《여자 없는 남자들》과 (〈바냐 아저씨〉가 수록된) 《체호프 단편선》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사 읽었다. 과연 영화가 더 깊이 와닿았다.

박유림 배우가 분한 (소냐를 맡은) 이유나의 마지막 수어 장면은 너무 인상적이어서, 언젠가 수어를 배워 자막 없이 다시 한번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