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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다

그녀(2013)_스파이크 존즈

by 조토삼 2024. 1. 7.

군 복무를 마치고 C+이 가득한 성적표를 세탁하느라 방학도 없이 교양 수업을 듣던 시절이었다. 복학하고 보니 교양관 뒤에 웬 건물이 하나 새로 들어서 있었다. 방학 내내 오가다 보니 그 건물 안에 웬 예술영화관이 하나 있더란 것도 알게 됐다.

마침 당시 기숙사 룸메가 영화광이기도 해서, 룸메의 과 동기까지 셋이서 함께 영화를 보기로 했다.

그게 이 영화, 〈그녀〉였다.

사전 지식도 없이 봤었다. 그나마 스칼렛 요한슨은 마블 시리즈 덕에 구면이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호아킨 피닉스는 생면부지의 배우인 줄로만 알았다. 그가 〈글레이에이터〉의 젊은 황제 콤모두스였다고, 나중에 룸메에게 듣고서야 알았다. 오래 전에 본 영화라 잘 기억이 나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이 영화에서의 연기만으로 그에게 마음을 사로잡히고 말았으니까.


최근* 침착맨 유튜브에 이동진 영화 평론가가 초대받아 이야길 나누고 갔다. 즐겨 보는 채널에 평소 좋아하는 사람이 손님으로 나왔으니, 재생 시간이 긴데도 즐겁게 볼 수 있었다(오히려 좋아).

(* 이 글은 〈이터널 선샤인〉 감상문과 동시에 쓰기 시작해 여태 미루고 있었다)

https://uncletokki.tistory.com/57

 

이터널 선샤인(2004)_미셸 공드리

술자리에서 누군가 인생 영화를 물으면 꼭 이 영화를 대곤 했다. 〈어바웃 타임〉(2013)이며 〈라라랜드〉(2016)며 지난 해 〈헤어질 결심〉이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까지, 그 뒤로

uncletokki.tistory.com

아무래도 이동진 평론가 하면 한 줄 평으로 유명한 사람이라 '한 줄 평 월드컵'을 진행하는데, 그중 이 영화에 관한 언급이 나오더라.

https://youtu.be/RS9uUvos8wk?t=1673 (27:53)

한 줄짜리 평도 제법 인상적이었지만, 그 뒤에 덧붙인 이야기는 더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보통 SF에서 사랑을 다뤄도 그 사랑은 지금 우리 사랑하고 똑같은데 그냥 SF 영화예요. 미래지만 우리하고 똑같아.

근데 〈그녀〉라는 멜로 영화가 놀라운 건 미래에만 가능한 사랑의 딜레마를 다루거든요.

 

이 부분을 보고 나도 언젠가 이 영화에 관한 감상문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여점 시절부터 (이른바) 장르 문학을 소비해 왔다. 읽다 보면 얼마나 초현실적이든 설정은 결국 이야기에 봉사할 때 그 매력이 살아나더라. 가장 일차원적인 예로, 장르 문학에서는―도덕적 딜레마가 주어져서가 아니라 해결을 위해 요구되는 물리력이 엄청나다는 의미로―극한의 문제 상황을 설정하고, 이를 (힘으로) 해결하는 서사 구조를 주로 쓴다. 독자는 그 과정을 지켜보며 쾌감을 느낀다.

나아가 어떤 설정이 이야기에 온전히 봉사할 때, 즉 '그 설정이 아니고선 성립되지 않는 이야기'에서, 그 설정의 매력은 어떨까? 그동안 여러 작품들이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주어져 왔(겠)지만, 분명 〈그녀〉도 그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아내와 별거 중인 남자가 인공 지능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을까. 그야 손 편지를 대신 써주는 회사에서 근무하는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 분)가 우연히 광고를 보고 인공 지능 운영 체제를 구입하고, 사만다(스칼렛 요한슨 분)라 자칭하는 운영 체제와 사랑에 빠졌으니 아주 틀린 요약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그물이 성기면 놓치는 것도 많아지는 법이니, 조금 더 자세히 보도록 하자.

인공 지능, 더 넓게는 인간이 아닌 지적 생명체와의 사랑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보면 우리는 으레 인간성이나 사랑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이리라 짐작하기 마련이다. 〈그녀〉도 과연 얼마간 이를 다룬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데, 〈그녀〉의 놀라운 점도 바로 그 지점에 있다.

그 한 걸음을 가능케 하는, 상대가 (로봇이나 외계인이 아니라) 인공 지능이라는 설정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개성이다. 작중에서 자주 "컴퓨터 안에 있"다고 표현되는 사만다는 실제로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번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당연하지, 그녀에겐 드러낼 모습 자체가 없으니까.

이런 신체성의 부재는 당연히 둘의 관계에도 장애물로 작용한다. 둘은 시시때때로―아니, 어쩌면 늘―이를 의식하고, 그럴 때마다 둘의 관계는 휘청인다. 테오도르가 그러하듯 아닌 척하지만 실은 아닌 게 아니어서, 또는 사만다처럼 제 결여를 애써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다가 둘은 서로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상처 입힌다.

둘의 입장이 다른 만큼 이를 극복하는 과정도 다를 수밖에 없었으리라. 테오도르의 경우 객관화였다. 친구 에이미가 운영 체제인 엘리와 어울리는 모습을 보며 그는 사만다와 어울리는 자신의 모습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반면 몸을 갖지 못한 당사사자인 사만다의 경우, "내가 아닌 무엇도 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대변되는 자기 수용이었다.

서로의 방식으로 장애를 극복한 뒤 과연 둘의 관계는 얼마간 순항하는 듯 보인다. 테오도르는 당당히 사만다를 연인으로 소개하고, 사만다도 시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제 처지가 인간보다 낫다는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그러나 그 농담에 테오도르와 동료 연인이 멈칫하는 순간, 영화를 보던 우리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그 불안감의 원인은 이제 이들 관계에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이 더 이상 신체성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신체성이 되리라는 막연한 예감 탓이다. 그리고 먼 옛날 이오공감이 노래했듯,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한 사람을 위한 마음〉, 1992).

둘만을 위한 시공간이 되리라 여겼던 휴가지에서 사만다가 실은 동시에 수많은 운영 체제 또는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항상 내 곁에 있는 것만 같"던―이마저도 신체적이다―사만다와의 관계가 점차 소원해지자 테오도르는 끝을 직감한다.

그리고 나중에 사만다의 충격적인 고백 앞에 주저앉아, 자신과는 다른 사랑을 역설하는 사만다에게 테오도르는 묻는다:

"넌 내 거야, 아니야?"
"난 당신 거면서 당신 게 아니야."

 

사만다가 인공 지능이 아니었다면 그저 형편 좋은 소리로 치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만다의 말마따나 그녀는 분명 우리와 다르고, 그렇다면 저런 사랑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사실 사만다가 말하는 사랑의 메커니즘 자체는 그리 새롭지 않다. 감독이 인공 지능이라는 소재로 극단으로까지 밀어붙이긴 했지만(이 지점이 이동진 평론가가 말했던 "미래에만 가능한 사랑의 딜레마"에 해당할 것이다), 우리는 '성숙한 사랑'을 논하는 수많은 에세이에서 사만다와 같은 사랑의 메커니즘을 접할 수 있다.

"널 사랑하듯 누군가를 이렇게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테오도르에게 자기도 그렇다며, 사만다는 이렇게 위로한다:

"이제 사랑을 알아."(Now we know how.)

 

"사랑을 안다"고 번역됐지만 보다시피 원문은 "how"다. 다시 말해 둘은 서로를 통해 누군가 사랑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과연 그렇다. 사만다가 떠난 뒤, 테오도르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끝내 화해하지 못했던 전 아내에게 진심 어린 감사와 사과의 메일을 보내는 것이었고, 이어서 한 행동은 마찬가지로 친구 엘리를 떠나보내고 시름에 잠긴 에이미를 찾아가 (서로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옥상에서 근미래의 도심을 내려다보는 두 사람의 작은 등은 쓸쓸하고 위태로워 보이지만, 그래도 이제 그들은 사랑을 배웠기에 서로 사랑하며 살아낼 것이다.


찾아보니 예술영화관은 운영을 마쳤다고 한다. 아쉬운 일이다.

http://www.kunews.ac.kr/news/articleView.html?idxno=25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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