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도 더 된 새내기 시절, 대학에서의 첫 수업은 '사고와 표현'이란 필수 교양 수업이었다. 프랑스 현대 철학을 전공하신 듯한 교수님은 첫 수업에서부터 우리에게 과제를 내주셨는데, 〈데이비드 게일〉(The Life of David Gale, 2003)이란 영화를 보고 A4 용지 한 쪽짜리 감상문을 써오란 것이었다.
내 경우엔 '마냥'이라는 부사의 사용을 칭찬받았던 기억이 난다. 부사란 순우리말로는 꾸밈씨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꾸미는 말인지라 문장에서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지만 이 부사를 잘 쓰면 말의 의미가 또렷해지거나 맛이 산다. 교수님이 보시기에 내가 쓴 '마냥'은 제법 잘 쓴 것으로 보였나 보다.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면서도 부사 하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작중 서래(탕웨이 분)의 대사, "산에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봐."에서 '마침내'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마침내'는 두 가지 면에서 어색하게 들린다. 우선 아내가 남편의 죽음을 두고 할 만한, 그러니까 맥락상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보다 단순하게는―낱말 자체가 구어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 아니다.
문어 투의 낱말이 주는 낯섦 때문인지, 서래의 '마침내'는 유독 인상적으로 들린다. 해준(박해일 분) 역시 그랬는지, "마침내…" 하고 입안에서 낱말을 굴려 본 다음에야 말을 이어간다. 그리고 입안에서 굴려 볼수록, 그러니까 서래라는 사람을 알아 갈수록 그 말이 무섭도록 정확하게 쓰였음을 깨닫게 된다.
말의 의미를 또렷하게 하고 그 맛을 살리는 게 잘 쓰인 부사라면, 서래의 "마침내"는 아주 잘 쓰인 부사임에 틀림없다. 그 한 마디로 서래가 처한 처지를, 그리고 서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니까.
그렇게 서래를 알게 돼 버린 해준은, 서래를 사랑하게 된다. 불가항력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미장센으로 유명한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서도 미술에 관해서는 할 말이 없다(사실 미장센이 뭔지도 잘 모른다). 대신 대사 미학에 관해서는 나름대로 느낀 바가 있었다.
작중 서래는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로, 조금 서툴긴 해도 우리말을 곧잘 구사한다. 어려운 낱말은 알아듣지 못하지만 대신 말도 글도 또박또박 정확하게 쓴다. 한국어가 서툰 서래를 위해 해준도 말을 쉽고 느리게, 무엇보다도 정확하게 하려 애쓴다. 그래서일까, 어딘지 연극적으로 느껴지는 대사들이 전혀 어색하게 들리지 않았다. 아주 영리한 장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장치를 십분 살려, 작중에서 두 사람의 교감은 주로 언어적으로 이루어진다. 육체관계는 묘사되지 않는다. 강박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인데, 영화 〈화양연화〉(2000)가 떠오르는 게 단순히 불륜이라는 공통된 소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해준의 아내 정안(이정현 분)은 아주 재미있는 대조를 보여준다. 부부는 "서로 밉고 싫은 때에도" 섹스는 매주 해야 한다는 정안은 늘 얄미운 직장 동료 이 주임 이야길 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는 게 막바지에 드러난다(이 순간 정안이 손에 든 자라와 석류는 블랙 코미디 그 자체다).
어쨌든 두 사람은 말이 많지 않지만, 서로에게 말을 정확하게 했다. 그런데 서래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던 순간을 언급할 때, 해준은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노라고 말한다. 그래, 해준은 분명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서래는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고,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도, 나중에 진실을 안 해준에게도 해준의 그 말은 분명 사랑한다는 말로 들린다.
그 사랑 고백을 들은 서래도, 해준을 사랑하게 됐다. 불가항력이었다.
말은 글과 달라서 본질적으로 시공간으로부터 동떨어진 것이 못 된다. 글로 쓰인 대사는 결국 배우가 읽는 것이니, 박해일과 탕웨이 두 배우의 연기가 대사를 완성한 셈이다. 두 사람의 침묵까지도 대사나 다름없었다.
모든 배우의 연기가 너무 좋았지만, 박해일 배우의 아저씨 연기는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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