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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_웨스 앤더슨

by 조토삼 2022. 11. 20.

상영 시간 내내 이런 화면을 볼 수 있다

지난 2018년 용산 CGV에서 재개봉했을 때 처음 보고, 마음에 들어서 최근 같은 감독의 〈프렌치 디스패치〉(2021)도 이수역 아트나인에서 봤다. (과장 좀 보태) 일시 정지할 때마다 배경 화면을 하나씩 건질 수 있을 만큼 매 화면이 이쁜, 스크린으로 보는 맛이 있는 영화들이었다.

 4년도 더 지난 오늘, 우연히 디즈니 플러스에서 발견하고 다시 보게 됐다. 조그만 노트북 화면이라 그만큼 감흥이 덜할 줄 알았는데, 웬걸. 오히려 첫 관람 때보다 즐겁게 봤고, 보고 난 뒤의 여운도 더 진하게 남았다. 감상에는 매체보다 수용자의 몫이 크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어? 저 친구 플래시 아냐?

기억을 더듬어 보면 18년 당시 첫 인상은 듣던 대로 화면이 참 이쁘다는 것이었고, 그 다음 인상은 "어? 저 친구 플래시 아냐?"였다. 그 전해 개봉한 〈스파이더맨: 홈커밍〉(2017)을 본 뒤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인데, 거기서의 얄미운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퍽 차분한 연기를 선보였다.

그뿐이랴, 사실 등장인물을 두고 보면 이보다 더 화려한 영화가 있을까 싶다. 주 드로가 작중 화자로 나오고(액자식 구성이다), 틸다 스윈튼은 노부인으로 잠깐 나오다 죽어버리지, 레아 세두는 그 집안 하녀로 길안내나 돕지, 윌럼 더포는 아예 인간 백정 노릇을 하질 않나…

영화에는 문외한인 나도 이름을 알 만한 배우들만 이 정도요, 이름은 모르지만 낯이 익은 배우들도 별 대사도 없이 나왔다 사라지곤 한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들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일 듯하다.


배경은 전운이 감도는 유럽, 명성이 자자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지배인 무슈 구스타브(랄프 파인스 분)는 '몸과 마음을 다해' 부유한 노부인들의 친구―이자 연인―노릇을 하고 있다. 어느 날 개전 소식을 알리는 지면으로 그들 중 하나인 마담 D(틸다 스윈튼 분)의 부고를 접하곤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자 호텔의 로비 보이 제로(토니 레볼로리 분)를 데리고 루츠로 떠난다.

그 뒤로는 그에게 명화를 물려준다는 마담 D의 유언이 공개되고, 이에 불만을 품은 그 아들의 보복(?)으로 두 사람이 위기에 처한다는, 퍽 고전적인 전개가 이어진다.

그렇다, 이 영화는 대놓고 '고전적'이다. 배경도, 내용도, 배우들이 그 안에서 맡은 역할도, 거기에 양식적이라고까지 할 만한 연극적 연기도 다분히 고전적인 인상을 준다. 강박적으로 대칭을 이룬 화면은 정적이고, 배우들을 멀찍이서 지켜보다 미끄러지듯 그 동선을 좇는 카메라도 (자료 화면으로나 보던) 오래된 영화를 연상케 한다.

며칠 전 썼던 〈20세기 소녀〉 감상문에서, "낭만주의는 과거에의 희구"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인용한 바 있다. 이 영화 역시 낭만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소녀〉가 비디오 가게며 도메인의 옛날 인터페이스로 그 시절을 꾸며냈듯이, 이 영화도 위에서 언급한 여러 장치들로 우리들이 살아보지 못한 어느 시절을 연출한다.

다만 두 영화가 과거를 그리(워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전자가 우리의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그 시절 자체를 그리는 반면, 후자는 우리가 그리워하는―'낭만'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그 무엇이 이미 생명을 다한 시절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무슈 구스타브는 그 낭만의 화신(化身, avatar)과도 같은 인물로 그려진다.

무슈 구스타브는, 작중에서 묘사한 대로, "(그의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불안하고 허영스럽고 천박하고 금발에 외로운(insecure, vain, superficial, blond, needy)" 인물이다.

일에 대한 자부심이 과하고, 부유한 노부인들과 놀아나는 주제에 뒤에선 험담을 일삼고, 탈옥한 처지에도 향수를 뿌리지 않고는 못 배겨서 이를 챙기지 않은 제로에게 폭언을 쏟아붓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제로가 이민자라는 이유로 검문에 걸리자 몸을 사리지 않고 그를 보호하고, 노부인들을 누구보다 진심으로 대하고, 제로의 집안 사정을 알고 나선 폭언을 사과하기도 한다.

겉멋은 또 어찌나 들었는지, 큰 호텔 지배인이면서도 재산도 별로 모으지 못했는데 그나마도 상당분이 낭만시 모음집이다. 이런 그의 허영을 잘 보여주는 장치로, 걸핏하면 시를 외려는 모습이 나오지만 적어도 작중에선 늘 무슨 일인가 벌어져 다 외지 못하고 끊기곤 한다.

그러나 달리 그를 낭만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본다면, 이는그의 허영보다는―더 이상 낭만을 꿈꾸지 못하는 시대를 보여주는 장치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결말 역시 퍽 고전적이다. 무슈 구스타브는 제로를 비롯한 여러 인연의 도움으로 악인을 물리치고, 누명을 벗고,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는다. 무슈 구스타브의 뒤를 이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지배인이 된 제로는 함께 그의 탈옥을 돕기도 한 연인 아가사(시얼샤 로넌 분)와 결혼한다. 무슈 구스타브는 언젠가 약속한 대로 둘의 주례를 봐 준다.

그 뒤 가상의 공화국이 점령당하고 호텔이 징발되자, 무슈 구스타브는 제로 내외와 함께 루츠로 향한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아가사는 두 사람을 기리는 시를 지어 낭송한다. 제로가 무슈 구스타브를 따라 산 《낭만시 모음집 1권》을 선물한 적이 있었는데, 무슈 구스타브나 제로가 매번 실패했던 시 낭송이 이들 셋만 남은 자리에서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전쟁고아 이민자와 빵집 더부살이, 무일푼인 두 사람을 편견 없이 대하고 응원한 덕에―아니, 이들뿐 아니라 모두를 그리 대해 온 덕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결국 모두가 행복해졌으니 그야말로 교훈적인 결말이 아닌가.

이대로 끝났다면 이쁘기만 한 성인 동화가 됐을 테지만, (늙은 제로가 들려 주는) 액자 속 이야기에는 진짜 결말이 따로 있다. 내게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2018)를 연상시키는 결말이었다. 나와는 무관해 보이던, 그저 배경으로만 여겼던 현실이 들이닥치고 나서야 비로소, 나를 둘러싼 일들은 사실 무엇 하나 나와 무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그랬다.

영화의 초반부와 같은 루츠로 가는 기차 안에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다른 결말로 이어지고 말았다는 사실이 특히 씁쓸한 여운을 남겼다. 시간이 흘러간 만큼 낭만은 우리에게서 더 멀어져 간 것 같아서.


작중 화자, 젊은 작가(주 드로 분)는 영락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지키느라 막대한 재산을 탕진해 버린 노인 제로에게 "이 호텔이 사라져 버린 그(무슈 구스타브)의 세상과 당신을 이어주는 끈"인지 묻는다. 이에 제로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답한다.

그의 세상? 아니, 그렇지 않아.
우리는 같은 사명을 가지고 있었네. 그러니 끈은 필요하지 않았지.
… 이 호텔은 아가사를 위한 걸세. 우린 여기서 행복했어.


내 생각에 그의 세상은 그가 들어서기 전에 이미 사라졌네.
구스타브는 훌륭한 품위와 함께 그 환상을 분명히 지켜내고 있었던 거지.

처음 개봉했을 때는 이 부분에 심각한 오역이 있었다. 재개봉하면서 번역을 고쳤는데, 디즈니 플러스는 여전히 처음의 오역을 고수(?)하고 있었다. 다른 곳에선 어떤지 모르겠지만 참 아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