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운동이나 컴퓨터 게임에는 통 관심이 없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축구나 농구를 즐기지도 않았고, 방과후에도 PC방에 게임을 하러 가지 않았다. 조금 더 자라 친구들이 해외 축구며 스타리그에 빠졌을 때도 나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내가 관심이 있었던 건 늘 종목 자체보다는 관련 밈(meme)들이었다.
지금은 그럭저럭 운동을 즐기는 으른이 됐지만, 여전히 구기 종목은 탁구공보다 큰 공은 다룰 줄 모르고, 전자오락은 롤은커녕 민속놀이 취급받는 스타도 할 때마다 깍두기 취급을 받는다(우리 땐 그런 게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처럼 생활체육인은 못 될망정 애호가일 수는 있겠으나, 나는 어느 쪽도 되지 못했다.
그런 내가 어쩌다 K리그, 그것도 2부 리그의 경기를 직관하게 됐느냐면, 계기는 동네 형 조서기관의 초대였다. 조서기관은 나와 달리 열렬한 구기 종목 애호가로, 끼리끼리 논다고 인도어파가 대부분인 내 친구들 중에선 참 드문 유형이었다.
애호가면 애호가지, 왜 또 "열렬한" 애호가인가. 구기 종목 냉담자인 내게 비한다면야 누구든 그럭저럭 애호가일 수 있겠다만, 조서기관은 두 가지 면에서 '그럭저럭' 수준을 넘어 '열렬하다'고 할 만하다.
우선, 조서기관은 축구도 야구도 해외 리그에는 관심이 없다. 그리고 국내 리그를 소비하는 다른 한국 사람들처럼 지역 연고팀을 응원하는데, 롯데 자이언츠야 실력을 떠나 컬트적 인기가 있다지만, 경남FC는 2부 리그 팀인데도 (일정이 허락하는 한) 원정까지 쫓아다닌다. 거기다 시합을 밖에서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는지, 최근에는 야구와 축구 심판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프로 경기까지는 무리더라도 사회인 야구나 유소년 축구의 심판을 보는 정도는 가능하다고 하고, 실제로도 겸직 허가를 받아 주말에 심판을 보러 다닌다.
이만하면 "열렬한" 애호가라 할 만하지 않을지.
그 "열렬한" 애호가의 초대를 받아 보러 간 시합은 경남FC 대 FC안양, (경남FC 입장에선) 안양에서의 원정 시합이었다. 시즌은 벌써 끝났고 1부 리그로의 승격과 2부 리그로의 강등이 걸린 시합들이 이어지고 있다는데, 5위로 정규 시즌을 마감한 경남FC는 이미 부천FC를 3 대 2로 무찌르고 올라와 리그 2위 FC안양과 겨루게 된 것이었다. 둘 중 승자가 1부 리그의 수원 삼성과 1부 승격(수원 삼성 입장에선 잔류)을 걸고 맞붙게 된다고 했다.
다시 말해 제법 중요한 시합이었던 셈인데, 주말 시합인 데다가 경기장이 서울 근교이기도 해서 예상보다 많은 팬들이 모였다. 수 년째 경남FC를 응원해 온 조서기관도 "원정 팬이 이렇게 많은 건 처음"이라고, 평소에는 열 명 될까 말까 한 정도라고 했다.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0 대 0으로 비겨 지고 말았다. 리그 순위가 높은 안양이 일종의 어드밴티지를 가졌던 셈인데, 경남FC는 그렇잖아도 수비력이 좋은 FC안양의 골망을 끝내 흔들지 못했다.
이기지 못해 아쉽긴 했지만, 막연하게 꿈꾸던 직관을 직접 해 봤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직관이라고 하면 역시 현장감을 기대하게 되는데, 현장감을 느끼긴 했지만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전용 구장이 아닌 종합 운동장이라(새 안양 시장님이 축덕이라 곧 전용 구장을 지을 거라'카더라') 경기장과 관중석 사이에 육상 트랙이 있어 선수들은 여전히 멀었다. 대신 응원단의 반응이 실시간으로 피부로 느껴졌다. 중요한 장면마다 터지는 환호며 탄성이 현장감을 더한달까.
시합 내내 그들이 보인 애정 어린 편애(?)도 소소한 관전 포인트였다. 안양 선수가 조금만 시간을 끈다 싶으면 야유가 쏟아진다든지…ㅎㅎ 우리 쪽만 그런 줄 알았는데, 시합 끝나자마자 펜스에 매달려 우리 쪽으로 야유를 날려대는 안양 어린이를 보고 빵 터지고 말았다. 그 와중 객관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 조서기관(진지한 게 아주 감독인 줄)을 보고 '과연 심판이군.' 싶었다.
시합이 끝난 뒤 설기현(!) 감독과 선수들이 응원석 앞으로 찾아와 죄스러운 얼굴로 인사했다. 팬들은 "내년에는 정규 시즌 1등해서 올라가자!"며 따뜻하게 위로와 격려를 보냈다. 승패를 떠나 무언가를 이렇게나 좋아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씨 좋은 날, 덕분에 즐거운 경험을 했다. 내년에는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길 응원해 본다.
'쓰다 > NIKKI' 카테고리의 다른 글
230518_그것'도' 읽어야지(〈제 꿈 꾸세요〉_김멜라) (1) | 2023.06.03 |
---|---|
230228_죽변항, 마늘치킨오비광장/영등포구청 (0) | 2023.03.28 |
221221_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2022) (0) | 2023.01.16 |
221209_사랑의 메커니즘 (2) | 2022.12.12 |
221125_〈헤어질 결심〉 대본집과 아이폰의 새 기능 (10) | 2022.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