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기 전까진 제목이 fast lives인 줄 알았다. 영화를 보다 보니 past lives, 그러니까 전생이더라. 작중에선 한국계 미국인 노라가 훗날 남편이 되는 유대계 미국인 아서에게 '인연'이란 개념을 설명하며 처음 언급된다. 인연을 옮길 만한 영어 단어가 없다고 여겼는지, 노라는 인연을 그대로 "인연"이라 발음한다.
줄거리는 이렇다. 서로의 첫사랑이었던 나영과 해성은 나영이 부모님을 따라 캐나다로 이민하면서 헤어진다. 10여 년이 지나 뉴욕에서 홀로서기를 시작한 나영이 우연히 해성이 인터넷에서 자기를 찾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둘은 다시 연락을 시작한다. 둘의 감정은 점점 커져가지만 물리적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결국 나영이 극작가로서의 커리어에 집중하기 위해 시간을 갖자고 말하면서…… 다시 10여 년이 흐른다.
그새(사실 그 직후) 나영은 아사를 만났고, 여러 가지 현실적 고려(그린 카드) 속에서 결혼해 살고 있다. 해성도 몇 번의 연애를 경험하고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던 중에, 휴가를 내 나영을 만나러 오겠다는 소식을 전한다. 해성이 나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는 아서는 불안하고, 나영은 뒤숭숭하고, 해성은 초조하다. 그렇게 셋이 모인 자리가, 영화의 첫 장면이기도 한
저 사람들은 무슨 사이일까?
에 대한 답이다.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인연因緣이란 불교에서 유래한 개념이다. 나영이 아서에게 인연을 설명할 때도 다분히 불교적인 예시를 든다. 이번 생에 연이 닿은 두 사람은 전생past lives에 수천 번 옷깃을 스친 사이인 것이라고. 그 기원이 무엇이건 인연은 한국인들의 정서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관념이고, 비록 한국말은 서툴지언정 (해성을 만날 때마다) 자기가 한국인임을 자각하는 나영 역시, 한국인으로서 그 관념이 자연스럽다.
이 영화에서 인연이란 관념은 딱 그 정도로 작용한다. 불교 철학적 깊이를 가졌다기보다는, 우리가 살아가며 '결국 그렇구나' 하고 느끼게 되는 경험적 진리에 가까운 무엇으로. 나영도 아서에게 그 정도로 이해하고 설명하며, 해성도 나영에게 그 정도로 환기하고 기원한다. 어렵게 말할 것 없이, 두 사람은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두 사람이 그 사실을 아프게 받아들이고, 다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얼마간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들었다. 이 영화의 미덕은 인식적 깊이보다는 솔직함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삶에 대한 솔직한 태도는 때로 그 자체로 어떤 여운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내게는 이 영화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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