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부가 상당히 길다. 자연과 어우러진 하라사와라는 마을의 겨울 풍광과 주민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사건'의 발단은 그 뒤, 마을에 글램핑장을 짓기로 한 도쿄의 연예 기획사가 주최한 주민 간담회라고 봐야 할 것이다.
도쿄와 시골이라니, 세상 물정 모르는 시골 주민들을 구워삶는 영악한 도시 사람들의 모습이 얼른 떠오르지만, 천만에. 주민들은 저마다 차분하게 기안의 맹점을 지적하고, 쩔쩔매는 실무자들에게 (화를 쏟아내는 대신) 책임자를 동반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 기획사 직원 마유즈미의 말마따나 "주민들은 바보가 아니"다.
회사 측도 마찬가지, 연예 기획사가 팔자에도 없는 글램핑장 사업을 벌인 것부터가 정부로부터 코로나 지원금을 타기 위해서였다. 마을 사정에 해박한 타쿠미라는 주민에게 좋은 술이라도 사들고 찾아가보라며 등을 떠밀린 직원들,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도 저들 말마따나 "코로나로 마음이 닳아"버린 평범한 사람들에 불과하다.
요컨대 (제목에서 보듯) 이 영화에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악인처럼 보이는 이들에게도 알고 보면 사정이 있더라는 식이 아니라, 애초에 선악의 대립이라는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는 쪽에 가깝다. 영화의 관심은 그보다는 입장이 서로 다른 이들 사이의 공존 가능성, 그리고 무엇보다 그 조건으로서의 책임이라는 문제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간담회에서 마을 회장이 발언한 "물은 아래로 흐른다"는 말은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물리 법칙에 관한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상류 측 사람의 행동이 하류 측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전자는 후자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도덕률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동시에, 뒤에서 다시 한번 언급하겠지만, 세상 이치가 그렇더라는 경험칙에 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어쨌든 하라사와로 돌아간 타카하시는 마을과 주민들의 삶을 진지하게 마주하고 싶다며 타쿠미에게 조언을 구한다. 서툰 도움과 오가는 문답 속에 공존의 가능성이 싹트는 듯 보이지만 우리는 끝내 그 결실을 확인하지 못한다. 혼자 귀갓길에 나선 타쿠미의 딸 하나가 산속에서 돌아오지 않으며 상황이 급변하기 때문이다.
마침내 하나를 발견했을 때 타쿠미는 시간을 뛰어넘어 사건의 전말을 재구再構해낸다. (하나에겐 이미 조심하도록 가르친 바 있는) 가시나무에 묻은 핏자국, 앞서 들린 총성, 야생 사슴이 사람을 공격하는 유일한 경우…… 그 순간 타쿠미는 타카하시와 마유즈미에게 던졌던 핀잔을 제 스스로에게 돌려줬을지도 모른다. "순진하기는." 하나에게 달려가려는 타카하시를 덮친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타쿠미의 행동은 일견 합리성을 결여한 듯 보인다. 당최 하나에게 일어난 일과 타카하시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우리가 느끼는 혼란은 어떤 결과에는 반드시 합당한 원인이 있기 마련이라는, 이를테면 인과응보의 사고방식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고방식으로는 당장 하나에게 일어난 일부터도 설명해낼 수 없지 않은가.
우리가 알다시피 법은 도덕과 달라서, 법학에서 선악은 우리의 통념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법학에서 악의란 쉽게 말해 "알고도 저지른 것"을 말하며 선의는 그 반대("모르고 저지른 것")다. 허가받은 사냥터에서 벗어나 사슴을 쏘았을 사냥꾼도 몰랐을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그러니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알았느냐 몰랐느냐가 아니다.
나는 앞서 이 영화의 관심이 책임이라는 문제에 있다고 쓰지 않고, 그런 것처럼 보인다고 썼다. 왜냐하면 (전작들에 비해) 짧은 상영 시간 끝에 감독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책임보다는 그 책임을 발생시키는 (상류 측으로부터의) 영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영향이 미친 대상이 하필 어린아이라는 점은 상류와 하류의 알레고리를 권력의 위상학과도 연결한다(당연하게도, 아이는 가장 낮은 존재다).
그리고 영화가 그 지점에서 그려내기를 멈추면서, 이 영화는 한 편의 우화寓話가 된다.
타쿠미의 행동은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단서가 영화 안에 없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미 귀천한 것으로 언급되는 타쿠미의 아내는 어쩌면 코로나로 사망했을지도 모른다(사진 속 하나의 모습은 현재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랬다면 외지인이 많은 하라사와의 특성상 외지인으로부터 감염되지 않았을까. 작중에서는 코로나로 마음이 망가지거나 닳아버린 사람들이 나온다. 타쿠미도 그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영화에는 특징적인 화면이 두 가지 나온다. 하나는 영화의 처음과 끝에 나오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화면―부감俯監에 반대되니 앙감仰監이라고 할까―이고, 다른 하나는 차 안에서 뒤창으로 밖을 보는 듯한 화면―이쪽은 후방 카메라 뷰라고 해야 할까―이다. 어느 쪽이든 인상적이고 뭔가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법한데 도무지 모르겠다(이동진 평론가의 한 줄 평도 이를 의식한 듯한데, 읽고 나서도 알 듯 말 듯하다).
납득하기 쉽지 않지만, 이해할 만한 단서가 영화 안에 없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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