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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읽다

판_김학중

by 조토삼 2023. 11. 4.

아내는 숙소를 집이라 불렀다

아내의 말을 따르자면/판 위에 숙소를 삼은 오늘은/판도 집이었다

집이 다만 하나의 판이라니/조금 서글프기도 하지만

우리가 묵어온 모든 자리가/서로 다른 장소였다 할지라도/단 하나의 집이라고 생각하니 따뜻했다/그 온기가 지나온 숙소를 이으면/하나의 판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떤 과학자는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사실/액체 위에 떠 있는 판과 같아서 끝없이 움직인다는데/그렇다면 아내와 나는 이 판의 진실을 살아내는/집의 가족이 아닐까

그녀가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잠드는 곳에/나 또한 이미 도착해 있다는 느낌/밀가루 반죽이 한켠에서 숙성되는 시간으로는/아무것도 가늠할 수 없으나/나는 잠시 하나의 판에 몸을 맡긴다/그러곤 집이라는 거대한 판의 이미지를 덮고 잠든다/지금은 그 이미지의 이불을 함께 덮는 우리이겠으니

다음은 늘 간단하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이튿날을 이어가는 것이다/여러개의 판에 담아/층층이

빵이 오븐에서 알맞게 부푸는 동안/열기를 견디는 빵 아래 판도 은밀하게 익어갈 것이다

그곳이 어디든 판이 있는 곳이면/우리가 짐을 풀어둔 집이 있다.

―〈판〉, 김학중 

 

화자의 아내에게는 "숙소를 집이라" 부르는 말버릇이 있다. 그 말버릇에 따르면 묵는 곳[宿所]마다 집이 되는 셈인데 어느 날에는 어느 판(板) 위에서 잠을 청하게 된 모양이다. 그 곡절은 알 길이 없으나―아마도 빵집을 하는 아내가 "밀가루 반죽이 한켠에서 숙성"하길 기다리는 동안 매트리스에 누운 게 아닐까―화자는 그런 자기네 신세를 두고 양가적 감정을 느낀다. 서글픔과 따뜻함이다.

그야 '내 집 마련'이 빛바랜 구호가 돼 버린 세상에 "집이 다만 하나의 판이라니", 그 서글픔에 공감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이해하기 어려운 쪽은 오히려 따뜻함이다. 화자가 느낀 따뜻함은 "우리가 묵어온 모든 자리가/서로 다른 장소였다 할지라도/단 하나의 집"이란 생각에서 비롯한다. 두 인용구 모두 '집'이란 시어를 포함하고 있으나 우리가 낱말에서 느끼는 온도는 확연히 다르다. 그리고 그 온도차가 일견 모순된 감정의 공존을 가능케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집'에는 여러 뜻이 있는데 그중 첫 번째가 '사람이나 동물이 추위,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 들어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요, 세 번째가 '가정을 이루고 생활하는 집안'이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첫 번째 뜻을 위 첫 번째 인용구와, 세 번째 뜻을 두 번째 인용구와 연결 지을 수 있다(화자의 아내가 "숙소를 집이라" 부를 때도 물론 세 번째 뜻으로 쓴 것이다). 그러니 화자에게 집이란 "그녀가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잠드는 곳에/나 또한 이미 도착해 있다는 느낌"으로 연상된다.

'집'이 한낱 건물이 아니라 집안을 뜻하면서 화자의 생각은 이제 끝 모를 확장이 가능해진다. 건물은 평수로, 개수로 셀 수 있을 따름이지만 집안에는 공간적 제약이 없기 때문이다. "그 온기가 지나온 숙소를 이으면/하나의 판"이 된다는 생각은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사실/액체 위에 떠 있는 판과 같아서 끝없이 움직인다"는 데까지 이어진다. 내외가 겨우 제 몸 누인 판이 (지각)판[plate]으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그리고 시의 후반부에 화자의 생각은 한 차원 더 나아간다. 2차원 면이었던 판에다 깊이를 더하는 것이다. 짐작건대 z축은 '시간'이다. 앞서 적용한 지각(地殼)의 유비에 따르면 지층 아래로 깊이 내려갈수록 무게가 더해져 암석이 녹아내릴 정도의 열이 발생한다는데, 화자도 지금 누워 "밀가루 반죽이 한켠에서 숙성되는 시간으로는/아무것도 가늠할 수 없으나" "우리에게 찾아오는 이튿날을 이어가"다 보면, 그리고 그 날이 거듭 쌓이다 보면("여러개의 판에 담아/층층이") '빵'도, '빵 아래 판'도 "은밀하게 익어갈 것"이란 기대를 품는다.

빵을 익히는 판이 "집의 가족"을 뜻한다면 가족이 힘껏 살아내는 동안 "은밀하게 익어갈" 빵의 자리에는 무엇을 집어 넣을 수 있을까. 나는 뻔하게도 그 자리에 '행복'을 집어 넣고 싶다.


지난 봄에 썼던 글을 이제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