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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읽다

사람, 장소, 환대_김현경

by 조토삼 2023. 11. 7.

서문에 소개된 흥미로운 소설 이야기로 시작하자. 무려 1824년에 쓰인 《그림자를 판 사나이》라는 소설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느 가난한 남자가 악마를 만나 자기 그림자를 금이 무한히 나오는 자루와 맞바꾼다. 남자는 부자가 되지만―우리가 짐작한 대로―이내 거래를 후회하게 된다. 사람들이 그림자가 없는 그를 꺼리게 된 것이다.

여기서 그치더라도 충분히 교훈적인 동화라 할 만하지만, 뒷이야기가 좀 더 있다. 다시 나타난 악마가 이번에는 그림자와 영혼의 거래를 제안한다. 남자는 이를 거절하고, 끝내 금이 나오는 자루마저 물에 던져버리고 만다(그림자도 자루도 없는 남자가 그 뒤로 마법 장화를 얻는 뒷이야기는 여기서는 생략하자).

여기까지 읽고 나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도대체 "그림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장 먼저 떠오름직한 답은 영혼이지만, 우리는 이미 악마의 두 번째 제안을 보지 않았는가.

저자는 그림자를 잃은 남자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됐다는 데 주목한다. 악마의 두 번째 제안에서 보듯 남자가 의심의 여지없이 영혼을 가지고 있었는데도(심지어 부자인데도!) 말이다. 즉,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좀 어려운 말로는, 수행하는perform 데는 영혼과 구분되는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고, 그림자는 그 무언가의 알레고리라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이 책은 영혼과 육체의 대립 속에서 간과되어온 그림자의 문제, 다시 말해 '사람'의 문제를 다룬다." 그리고 "사람, 장소, 그리고 환대"는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이다. 셋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고, 저자는 그 연결을 이렇게 정리한다: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이다.

 

위 세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인간과 사람을 구분해야 한다. 인간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고, 사람은 사회적 인정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느 악한을 '금수만도 못한 놈'이라 비난한들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달라지진 않는다. 이처럼 (인간임과 구분되는)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사람의 문제를 다루며 저자는 특히 모욕에 관해―장章 하나를 할애할 정도로―두껍게 쓰고 있다. 모욕은 일차적으로 명예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돼 왔다. (아리스토텔레스적) "명예 개념은 사람들이 사회 안에 각자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었고, 그 자리에 어울리는 인간이 되려고 노력했던 시대의 윤리 감각"에 기초하고 있고, 모욕이란 바로 그 자격에 대한 의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명예란 한물간 개념으로 느껴진다. "내가 누군지 알아?"로 대변되는 갑질은 공분을 사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우선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피터 버거는 현대 사회의 중요한 특징으로 "명예에서 존엄으로의" 이동을 들고 있다.* 명예가 사회에서의 자리/역할에 기초한 반면, 존엄은 모든 인간이 타고나는 것이다.

(* 《세계 인권 선언》은 1조 1항에서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서 동등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처럼 현대 사회의 도덕이 존엄에 기초하고 있는 한 모욕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도 모욕은―특히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서―감정 표현의 문제로 다뤄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게, 모욕이 사람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중요하다는 게 저자의 입장이다:

근대화는 모욕(…)을 없애지 못하였으며, 다만 그것을 더 넓고 눈에 띄지 않는 싸움터로 옮겼을 뿐이다.
(…)
'굴욕'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지배적인 모욕의 형식을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일 것이다.
(…)
굴욕과 모욕의 차이는 무엇인가? 모욕에는 언제나 가해자가 있지만, 굴욕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이 서로 예의 바르게 행동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굴욕을 느낄 수 있다.
(…)
누구도 나를 모욕하지 않았다면, 내가 느끼는 굴욕감은 전적으로 나 자신의 문제가 된다.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들은 이것을 자존감의 결여 탓으로 돌린다. (…) 실직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이 굴욕으로 느껴진다면, 당신에게 자존감이 부족한 것이다.
(…)
하지만 한 사람이 자존감을 유지하려면, 그에게 실제로 자신의 존엄dignity을 지킬 수단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자존감은 아큐의 '정신승리법'과 비슷해져버린다.

 


마지막으로 환대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사실 이 책은 몇 년 전에 처음 읽었다. 전 세계가 난민 문제로 시끄러웠을 때 남 일인 줄로만 알았던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났다. 예멘 난민들이 제주에도 들이닥친 것이다. 당시에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였던 배우 정우성 씨가 욕을 많이 먹었다. 저는 중세 성채를 연상케 하는 집에서 안락하게 살면서, 남들더러는 정체도 모를 난민들과 부대끼며 살라는 말이냐고.

나는 그때 공부 중이었고, 물론 난민 문제도 배운 적이 있었다. 시의성이 있다는 이유로 그해에는 여느 해보다 더 두껍게 배웠다. 당연하게도―그리고 당연한 만큼 슬프게도―현실은 배움과 달랐다. 그때 선생님께 이 책을 추천받았다.

앞서 조악하게 정리한 내용은 이 책의 4장까지에 해당한다. 이 책의 5장과 6장은 각각 〈우정의 조건〉과 〈절대적 환대〉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 책이 2015년에 쓰였으니 예멘 난민 문제를 염두에 두고 쓰이진 않았을 것이다(물론 난민이 하루이틀 된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일상의 영역에서도 이 책의 논의를 새겨읽을 여지는 충분하다.

외국인에 대한 환대에 관해 쓴 부분을 함께 읽어보자:

외국인에 대한 환대의 철회는 그들에게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에 의해 정당화된다. '우리나라에서 받는 대접이 못마땅하다면 자기네 나라로 가면 된다.' 하지만 삶의 터전을 한번 바꾸었다가 다시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외국인'이라는 말 속에 함축되어 있는 다른 장소는 종종 허구적인 것으로 밝혀진다.

 

여기서 저자가 드는 두 가지 예시 중 하나는 전후 재일조선인이다.

이처럼 철회가 가능한 환대는 (절대적 환대가 아닌) 조건부 환대이다. '조건부'의 의미를 더 분명히 하기 위해 다음 부분도 함께 읽어보자:

낙인을 지닌 개인이 정상인들로부터 존중의 의례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이처럼 적절하게 처신하는 한에서이다. 낙인자는 자신에게 베풀어진 관용의 한계를 시험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존재가 조건부로 수용되었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정상인과 똑같은 권리를 누리려 드는 낙인자는 곧 제재에 부딪친다.

 

저자는 물론 절대적 환대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절대적'이란 수식어가 주는 아찔한 인상과 달리, 절대적 환대는 '빤스 한 장까지 다 벗어주자'는 말이 아님도 분명히 한다. 앞서 환대가 누군가에게 자리를 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때 우리는 구둣발로 우리 집 현관으로 들이닥치는 생면부지의 외국인을 떠올리기 쉽지만, 누구도 우리에게 사적 공간까지 개방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환대로써 주어지는 자리란 사회에서의, 즉 공적 공간에서의 자리이다. 그들이 우리 사이에서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저자는 우리를 설득하기 위해 인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대신 차분하게 타이른다,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고.


글이 생각보다 늦어지고 또 길어지고 말았다. 물론 게으른 탓이겠지만, 그보다도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다. 내용을 충분히 소화해내지 못했고, 그래서 쉽게 풀어내지 못했다. 고작 이만큼 쓰기 위해서 몇 년에 걸쳐 여러 차례 읽어야 했고, 또 쉬어줘야 했다.

부족한 능력으로 하고 싶은 말만 겨우 구겨넣느라 여러 중요한 논의―고프먼의 '구조'와 '상호작용 질서'의 구분이라든지―를 생략했다. 일독을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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