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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읽다

인간 실격_다자이 오사무

by 조토삼 2023. 11. 7.

《총, 균, 쇠》 감상문에서도 인용한 바 있는 '첫 문장이 인상적인 소설들'이란 게시글에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의 첫 문장도 있었다 :

부끄럼 많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부끄럼 많은 생애란 어떤 삶일까, 저 문장을 접할 때마다 강렬한 인상을 받으면서도 정작 책은 읽어보지 않고 살았다. 그러다가 이 책을 정말 감명 깊게 읽었다는, 다자이 오사무를 좋아하는 동료에게서 선물 받으면서 읽어보게 됐다.


당시에 먼저 읽고 있었던 《사람, 장소, 환대》와 함께 읽어서인지, 거기서 환기한 개념틀이 이 책을 읽어나가는 데도 도움이 됐다. 전이라면 막연히 (중2의) 가슴을 때렸을 제목도 조금은 달리 읽혔다. 예를 들어 《사람, 장소, 환대》 감상문에서 이런 문장을 인용했더랬다: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실격失格이란 격을 잃었다는 말이고, 《표준국어대사전》은 이를 "기준 미달이나 기준 초과, 규칙 위반 따위로 자격을 잃음"이라고 풀이한다. 그러니까 '인간 실격'이란 곧 '사람의 자격을 잃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주인공 요조가 바로 그런 인물, 즉 인간(사람)으로서 실격당한 인물로 묘사된다.*

(* 《인간 실격》에서는 인간과 사람을 굳이 구분하지 않고, 인간이라고 쓴다. 우리는 《사람, 장소, 환대》의 도움을 받아 인간을 (생물학적) 인간과 구분되는 (사회적) 사람으로 읽는 게 좋겠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
그런 본성 또한 인간이 되는 데 필요한 자격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저 자신에 대한 절망감에 휩싸이곤 했습니다.

 

요조는 "그저 두렵고 거북해서 그 어색함을 못 이긴 나머지" 익살로 사람들을 ―"가족을 웃겼고, 또 가족보다 더 불가사의하고 무시무시한 머슴이랑 하녀들"까지도 "필사적으로" 웃긴다. 신분을 가리지 않은 데서 알 수 있듯, 요조가 두려워한 것은 진정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였다.

스스로 고백한 대로 요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인간을 두려워하는데, 이런 요조의 불능은 요조의 결여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누구도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이해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요컨대 요조에게는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무엇이 결여돼 있고, 그래서 그는 인간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작중에서 요조의 결여는 일종의 결손처럼 묘사된다. 요조는 부유한 집에서 나고 자란 잘생기고 똑똑한 젊은이지만, 이 모든 사회적 표지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은 요조를 경멸하고 여자들은 요조를 마음껏 휘두른다. 그리고 요조는 이들에게 전혀 저항하지 못한다.

우리는 여기서 요조의 실격 사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앞서 인용한 사전에서는 실격 사유의 예시로 세 가지―기준 미달, 기준 초과, 규칙 위반 등―를 들고 있는데, 짐작건대 요조의 사유는 ‘기준 미달’이다. 그리고 요조가 타고나지 못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본성이란 “화를 내는 인간의 얼굴”로 대변되는 적의敵意이다. 여기서 말하는 적의란, 남을 해치더라도 자기 존재를 지키려는 자기 보호 본능을 말한다.

보라, 우리의 요조가 외부의 적의로부터 자기를 지키기 위해 택한 전략을. 그는 맞서는 대신 상대를 웃기며 부디 그가 화를 내지 않아주길 바랄 뿐이다. 요조의 이런 태도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신의 진노를 피하고자 그저 빌 뿐인 원시 종교의 제의를 연상케 한다. 요조가 그들 신께 바치는 제물은 제 피와 살이며, 그래서 요조는 살아갈수록 죽어간다.

요조는 나중에 얼마간 세상을 이해하게 되지만, 더 큰 절망을 맛보고 무너져내린다. 그는 끝내 자신의 결여를 메우지 못한 것이다.


읽으면서는 읽고 나서 한동안 우울감에 젖어 지내진 않을까 하는 걱정도 했다. 결과적으로 그런 일어나지 않았다. 안도감이 들어야 마땅한데 묘한 상실감도 함께 느꼈다. 좀 더 어려서 읽었다면 달리 읽혔을 것 같아서였다.

돌이켜보면 이른바 '중2병'을 참 오래도 앓았더랬다. 괜한 우울감에 젖어서 지샌 밤이 적지 않았다. 생산성에는 전혀 보탬이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애틋한 시간들. 그 시절의 감수성(?)을 이제는 영영 잃어버린 것만 같아 쓸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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