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적어도 한 달에 한 권씩은 책을 읽기로 했다. 1월의 책은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이었다. 언젠가 읽겠노라 미뤄둔 책이 한 수레인데 굳이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초대받은 독서 모임의 1월 선정 도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연초부터 일을 시작하면서 결국 모임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책은 다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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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외로운 직딩의 1월 독서 리뷰 - 이렇게만 읽고 싶다~
1월에는 소설 2권 레시피 1권 시집 1권 사회과학 1권 으로 고른 독서를 보여줬다. 살면서 비전공 도서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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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은 이름은 들어봤지만 정작 그 책은 한 권도 읽어 보지 않았던, 그래서 내게는 '노골적인 제목의 연애 소설을 쓰는 사람' 정도로 여겨지던 작가였다. 그 제목들이 (성공적인) 현지화의 결과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게 됐다.
보통에게 관심을 가진 건 신형철 평론가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읽으면서였다(최근 내 독서는 거의 그에게 빚지고 있다). 〈보통을 읽고 나는 쓰네〉라는 장에서 그는 몇 편의 영화*를 소개하며 어떤 세대 남자들을 가정한다:
"1970년 전후로 태어나 1990년대에 첫 연애를 시작한, 20대 내내 두세 번의 연애를 경험했으나 대체로 실패한, 30대를 통과하면서 비로소 지난 사랑의 패착을 분석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진, 그리하여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 지난 사랑을 소재로 한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영화를 내놓은 몇 명의 남자 감독들". 그리고 그는 "이 감독들이 30대의 어느 날엔가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을 읽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마침 그가 인용한 영화들을 즐겁게 보기도 해서, 보통이 가장 최근에 쓴 소설부터 읽어 보기로 했다.
(* 이 장에서 다루는 영화들은 〈시라노; 연애조작단〉(2010), 〈러브픽션〉(2012), 〈건축학개론〉(2012), 〈내 아내의 모든 것〉(2012)이다. 덤으로 〈500일의 서머〉(2009)도 있다)
라비 부부는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처음 만난 이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좀체 묻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린다. 마치 그들 관계의 실질적인 이야기들은 적절하거나 생산적인 호기심의 영역이 아니라고 여기는 듯하다. 이들 부부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이 지금 골몰해 있는 중요한 질문에 답해본 일이 없다. "한동안 결혼 생활을 해보니 어떻던가요?"
이 책에서 보통의 기획은 보통은 "Happily ever after(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로 얼버무리는 결말 이후를 포함하는 '사랑의 (전) 과정[The Course of Love]'(이 책의 원제이기도 하다)을 보이는 것이다: "보통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사랑의 시작이다." 따라서 거의 모든 사랑 이야기에서 종착지로 그려지는 결혼은 첫 번째 부에서 이미 성사되고, 그 뒤는 결혼한 부부가 겪음직한 온갖 일들로 채워진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고, 그 과정에서 서로 오해하고 다투고, 다른 이성에게로 눈을 돌리기도 하고… 줄거리만 놓고 본다면 그야말로 특별할 것 없는 '사랑'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게 이 소설은 아주 특별한 사랑 '이야기'로 읽혔다.
신형철 평론가가 썼듯이 "보통의 개성은" "그의 '내용'보다는 '형식' 쪽"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노스럽 프라이를 인용해 산문으로 된 문학 갈래를 소설, 로망스, 고백, 아나토미 네 가지로 분류하고 (맛집에서 맛의 비결을 알아내는 맛집 블로거처럼) 보통의 소설에서 아나토미라는 첨가물을 발견해낸다. 아나토미(Anatomy)란 해부학을 뜻하는 그 이름처럼 "인간을 어떤 관념의 표상으로 보고 그 인간(관념)을 해석하고 해체하는 박학다식한 글쓰기" 양식이라고 한다.
과연 보통의 소설에는 두 서술자가 번갈아 나타나는데, 먼저 라비 부부의 언행과 그 내면 심리를 현재형 어미로 '있는 그대로' 전하고, 다음으로 그에 대한 해설을 덧붙이는 식이다. 우리는 후자를 "아나토미를 위해 필요한 제3의 시선, 즉 '사랑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대해' 그리는 시선"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사랑에 대해' 그리는 시선―신형철 평론가가 편의상 '닥터 러브'라 이름 붙인―에 의해 작중 라비와 커스틴이 경험하는 '사랑의 과정'은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으로 그려진다. 각자의 유년기 경험에 뿌리내린 콤플렉스가 관계에 개성적인 요철(凹凸)을 만든다는 점에서 개인적이고, 그러면서도 모든 연인이 겪음직한 요철의 존재 자체는 보편적이라 할 만하다.
우리도 라비나 커스틴과 마찬가지로 저마다 콤플렉스를 안고 있고, 그로 인해 상대방에게 유치하게 굴거나 필요 이상으로 잔인해본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에야 어리고 부족했던 자신과, 그 속내를 알 수 없어 괴물처럼 여겨지던―그러나 실은 나와 마찬가지로 어리고 부족했을 뿐인―상대를 비로소 용서할 수 있게 된 경험도 해보지 않았는가.
우리가 누군가를 깊이 이해할 때 우리는 그를 진정으로 미워할 수 없다. 그리고 닥터 러브는 바로 이 이해를 돕는다. 이처럼 닥터 러브가 집도하는 해부는,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연인을 향한 그의 시선은, '해부'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바와는 달리 따뜻하기 그지없다.
책은 무조건 새로 사 읽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 책은 지인에게서 빌려 읽었다. 읽으면서 그가 친 밑줄까지 볼 수 있었는데, 나와 다른 감상을 확인하는 재미가 있었다("여기다 밑줄을 친다고?"). 한 자리에 모여 감상을 나누는 독서 모임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나 말고 다른 사람의 감상을 확인할 수 있었던 즐거운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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