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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읽다

인생의 역사_신형철

by 조토삼 2023. 3. 16.

이번 달*엔 허리띠를 졸라매자는 아침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다른 일로 들른 교보문고에서 신형철 문학 평론가의 신간을 발견하곤 홀린 듯 집어 들고 말았다. 서점, 특히 대형 서점은 다이소나 아트박스 못지않게 위험하다. 아니, 상품의 가격대를 생각하면 그보다 더 치명적이다.

(* 작년 11월에 이 책을 산 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인용하고 싶어서 본가에서 이 책을 가져올 때까지 마저 쓰지 못했다)


이번에는 시화(詩話)라고 한다. 서문만 읽어봐도 내가 흠모하는 그의 문장은 여전했다.

나는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읽고 그의 문장에 반했다. 영화 잡지 《씨네21》의 지면을 빌려 쓴 영화 평론을 모은 책이었다. 많이 읽은 이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그도 글을 쓰면서 자주 인용하는데, 서문에서 아예 책의 제목부터 장승리 시인의 시구(〈말〉)에서 땄노라 밝히고 있다:

모든 해석자는 '더' 좋은 해석이 아니라 '가장' 좋은 해석을 꿈꾼다. 이 꿈에 붙일 수 있는 이름 하나를 장승리의 시 「말」의 한 구절에서 얻었다.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내게 이 말은 세상의 모든 작품들이 세상의 모든 해석자들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렇다면 해석자의 꿈이란 '정확한 사랑'에 도달하는 일일 것이다.

 

그의 글은 얼핏 (읽기) 어렵게 쓴 글처럼 보이지만, 어렵게 쓴 글과 정확하게 쓴 글은 구분해야 한다. 내가 적지 않은 시간을 수험에 매진하며 배운 한 가지는 말과 글로 풀어내지 못하면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단정적으로 말한다면, 어렵게 쓴 글은 못 쓴 글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정확하게 쓴 글은 어떤가? 문득 이동진 영화 평론가가 쓴 한 줄 평에 관한 논란이 떠오른다. 늘 쓰는 빨간 안경만큼이나 한 줄 평으로도 유명한 그는 지난해 영화 〈기생충〉을 두고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라고 썼다.

얼마나 좋은 영화인지 알리고자 쓴 평인데, 뜻밖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말이 뭐 이렇게 어려워?"였다. 그는 얼마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억울함을 호소한 바 있다. 괜히 멋부리려고 그렇게 쓴 게 아니라고. 이어서 자기가 쓴 한 줄 평을 낱말 하나하나 떼서 풀이했는데, 듣고 보면 과연 납득할 만하다.

이처럼 정확하게 쓴 글은 글쓴이가 그렇게 쓰지 않고서는 의도를 온전히 전할 수 없다고 여기며 쓴 글이다. 즉, 어렵게 쓴 게 아니라 쓰고 보니 어려워진 것이다. 그래서 당장 한 눈에 읽히지 않더라도 천천히 곱씹다 보면 아, 하고 의미를 깨닫는 순간이 온다.

이때 독자는 머릿속에서 구체화되지 않고 떠다니던 생각들이 한 줄로 꿰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는 신형철 평론가의 글을 읽으면서 그런 경험을 한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종교를 가져본 적이 없지만, 종교―또는 신의 존재 여부―에 관한 입장은 자라며 조금씩 달라져 왔던 것 같다. 냉소적이기도 했고, 알 수 없다고 겸손한 체한 적도 있었고, 있긴 하되 당신들의 믿음과는 다르리라는 비뚤어진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무엇이든 그런 것이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와 같은 불신자(者)는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간절히 그를 바라는 저들 곁에만이라도.

구약의 〈욥기〉를 다룬 〈무죄한 이들의 고통에 대하여〉에서,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심지어 그가 믿고 따른 야훼에 의한―환난에 처한 욥의 절규를 전하며, 그는 "원시적 인과론에 기대 타인의 고통을 신의 응징이라 말하는" "가장 천박한 수준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이들"은 물론 (슬라보예 지젝의 말을 빌려) "정의롭지도 불의하지도 않"고 "다만 무능할 뿐"인 유대교의 신을 '보여' 준다.

뭇 사람들 앞에서 신의 무능을 비웃고 욥을 추켜세운 지젝과 달리, 그는 욥을 돌아본다: "그러나 정작 욥 자신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지 않는가."

그는 그저 신이 나타나주기만을 기다렸고 그리되었으니 됐다는 듯이 행동한다. (…) 욥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 때문에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 불행의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다. 인간은 자신의 불행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견디느니 차라리 어떻게든 의미를 찾으려 헤매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

신은 그때 비로소 탄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력히 입증하는 증거 앞에서 오히려 신이 발명되고야 마는 역설. 가장 끔찍한 고통을 겪은 인간이 오히려 신 앞에 무릎을 꿇기를 선택하는 아이러니. (…) 무신론자에게 신을 받아들이는 일이란 곧 사유와 의지의 패배를 뜻할 뿐이지만, 고통의 무의미를 견딜 수 없어 신을 발명한 이들을 누가 감히 '패배한'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이 신을 발명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생각이 없다면 말이다.

 

마지막 문장은 이영광 시인의 〈사랑의 발명〉을 다룬 〈무정한 신과 사랑의 발명〉의 마지막 문단과 이어진다:

나는 인간이 신 없이 종교적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를 생각하는 무신론자인데, 나에게 그 무엇보다 종교적인 사건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곁에 있겠다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쥐고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염려하는 사람이다.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 이 생각을 믿는다.

 

 

욥기가 쓰인 것이 수천 년 전이니, 그동안 사람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 들이닥친 일이 얼마나 더 많았을까. 우리는 무수한 사람이 죽어간 역사적 사건을 배워서 알고, 누군가는 겪어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지금도 그 한가운데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는 2014년 4월 16일이 하나의 분기점이 됐다. 앞서 종교에 대한 내 입장이 언제부터 바뀌었는지 모르겠다고 했으나, 아마도 그 이후일 것이다. 그 뒤로도 슬픔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밀어닥치고 있다. 그동안 나는 막연히 '감히'라는 단어를 떠올리곤 했을 뿐, '감히' 그 생각을 정리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다 신형철 평론가의 글을 읽고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번에 글을 쓰면서 너무 많이 인용했다는 반성이 들지만, 그래도 서문만은 인용하고 마쳐야겠다. 이번 책 서문(〈책머리에―내가 겪은 시를 엮으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인생'은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특별한 말이다. 사전에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 혹은 그 기간'이라는 뜻별하지 않은 뜻 말고도 '어떤 사람과 그의 삶 모두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는 특별한 뜻이 적혀 있다. 이런 예문과 함께. "인생이 불쌍해서 살려준다." 인생은 '살려줘야 할 정도로' 불쌍한 것이다. 왜 그런가.

(…)

그러니까 인생은 이해할 수 없어서 불쌍한 것이다. 문제를 푸는 사람 자신이 문제의 구성 부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풀 수가 없는데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풀어야 하니까 더 불쌍한 것이다. 체호프가 러시아어로 '아, 인생이여'라고 할 때 우리는 한국어로 '아이고, 인생아'라고 한다. 불쌍해서, 죽일 수도 없을 만큼 불쌍해서.

 

최은영 작가의 《내게 무해한 사람》을 읽으면서도 그랬지만, 이렇게 서문이나 작가의 말에서 한 대 얻어맞고 나면 그야말로 무장 해제가 돼 버리고 만다. 그때부터는 속수무책으로 읽어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