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자주 읽지는 않지만 책을 보는 건 좋아한다. 서점도 일부러 찾아가진 않더라도 가까이에 있으면 괜히 한번 들러보곤 한다. 이번에도 신도림역에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교보문고에 들렀다. 선물받은 책갈피를 끼울 책이 필요했다.
진열대를 둘러보다 제목에 이끌려 소설책 한 권을 집어들었다.
단편소설 일곱 편을 하나로 묶은 단편집인데, 표제작이 없다. 내 이목을 끈 제목은 수록작 〈고백〉에서 친구 진희에 대한 미주의 속엣말("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을 인용한 것인데, 책 말미에 실린 〈작가의 말〉과 함께 읽으면 보다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개인행동을 하고 싶었다. 나의 개인행동은 아무도 해치지 않으리라 믿었다. 나는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통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주는 고통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몸으로 느꼈으니까.
그러나 그랬을까, 내가.
일곱 편의 글은 모두 어려서 겪은 일을 자라서 돌아보는 구성으로 쓰였다. 글 속에서―서술자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아이들은 모두 일상적인 폭력과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속상하게도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큰 아픔을, 그래서 가족이 가장 큰 아픔을 준다). 그러나 글의 관심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글의 놀라움은 상처 입은 인물을 중심에 두면서도 '내게 가해지는 폭력'에서 그치지 않고 '(그런) 내가 가할 수 있는 폭력'을 주제로 삼았다는 데 있다. 내게 위안을 주던―나와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폭력의 피해자로 묘사되는―이들은 나의 서투름으로 (다시) 상처 입고 나를 떠난다. 나는 더 자라서 그때를 돌아보고, 아픈 내가 친 발버둥으로 내가 아끼는 누군가가 다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이는 앞서 인용한 〈작가의 말〉과 이어진다.
읽으면서 자주 찡그렸다. 아이에게 가해지는 폭력도 물론 아팠지만, 더 자란 아이의 솔직함은 그보다도 아팠다.
이 책은 하루에 두어 편씩 사흘에 걸쳐 다 읽었다. 언젠가 같은 작가의 《쇼코의 미소》를 읽다 말았던 적이 있다. 오랜 수험 탓인지 사건 위주로 전개되지 않는 글이 잘 읽히지 않았다. 〈작가의 말〉을 먼저 읽지 않았다면 이 책도 다 읽어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인용한 〈작가의 말〉보다도 뒤에 〈수록 작품의 발표 지면〉이 소개돼 있는데, 여기서 발표 시점까지도 확인할 수 있다. 시기적으로야 가깝다지만 따로 쓰인 글이 이처럼 하나의 주제로 묶일 수 있다는 점이 새삼 놀라웠다. 그 시기, 이 문제를 두고 치열하게 고민했을 작가의 진정성이 와닿았다. 그 고민이 얼마나 오랜 것일지, 《쇼코의 미소》도 다시금 읽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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