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 강조하지만, 출장차 나와 있던 조과장은 평일에는 회사로 출근해야 했다. 대체 휴일이었던 월요일이 지나고, 화요일이 우리 가족이 그리스에서 맞이한 첫 근무일이었다.
60대이신 부모님이나 초저녁이면 잠드는 조과장 모두 아침이 워낙 일러서 덩달아 나도 여섯 시쯤 눈이 뜨였다. 엄마가 분주히 아침을 준비 중이셨다. 숙소 조식이 여덟 시부터라 그 전에 출근하는 조과장 아침은 엄마가 차려주시기로 한 것이다. 덤으로 점심 때 먹을 계란까지 삶아 조과장 손에 들려 보내는 게 엄마의 아침 일과였다.
출장이 잦은 아들이 이역만리 타국에서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닐까 늘 걱정이셨는데, 당신 손으로 끼니를 챙겨 줄 수 있어서 엄마는 아주 만족스러우신 것 같았다.
여덟 시를 몇 분 남기고, 조식을 먹으러 1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숙소의 전천후 직원인 요타가 음식을 준비 중이었다.
"야 사스γεια σας!"
관광지도 잘 모르는 주제에 해외 여행을 떠날 때마다 그래도 잊지 않고 챙기는 게 있다면, 그 나라말로 인사말을 찾아보는 것이다. 보통 "반갑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고맙습니다", "죄송합니다", "실례합니다", "건배" 정도를 찾아본다. 지금은 다 까먹었지만 그래도 하나는 기억난다: 그리스에선 만나면 반갑다고 "야 사스!"라고 했다. 좀 더 친근하게는 "야".
조식은 매일 대동소이했는데, 시리얼 대신 그리스 가정식이 나온 점이 좋았다.
한창 아침을 먹는데 주인 아저씨 토마스 씨가 오늘은 뭐 할 거냐고 먼저 말을 걸었다. 우리 쪽에선 영어 꿈나무 아빠가 주로 답하셨고, 나는 중간에서 거들어 드렸다.
"주변에 볼 만한 게 있나요?"
주인 아저씨 왈, 가볼 만한 곳은 죄다 차로 한 시간씩은 떨어져 있다고 했다. 그리고 동네에는 볼 게 없으니 가까운 프톨레마이다로 나가길 권했다. 버스도 있고, 시간만 맞춘다면 직접 태워 주겠다고.
프톨레마이다는 다음날 가 보기로 하고, 첫날은 동네 구경으로 정했다.
내가 씻는 동안 부모님 두 분이서 먼저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오셨다. 산책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는데, 토마스 아저씨 말마따나 동네가 정말 작고 볼 게 없었던 것이다. 다녀오신 부모님의 감상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길거리에 큰 개가 정말 많다. 둘째, 카페에는 죄다 할아버지들만 모여서는 줄담배를 태우고 앉아 있더라.
특히 두 번째가 엄마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엄마는 떠나는 날까지도 "우리나라에선 카페에 온통 아줌마, 할머니 들인데 이 나라에는 그 사람들 다 어디 가고 할아버지만 노상 앉아 있느냐"고 궁금해 하셨다. 나중에 토마스 아저씨에게도 물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아저씨는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우리끼리 추측하기로는, 옛날 우리나라 시골에서도 여자는 집에만 있고 남자만 나와 대낮부터 술 푸고 있었듯이, 그리스 시골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당장 프톨레마이다쯤 되는 도시에만 나가봐도 카페에 남녀노소 골고루 있었으니, 제법 그럴싸한 추측 같았다.
그리고 시골이라 그런지 개를 풀어놓고 키우는 분위기였는데, 문제는 이 개들이 커도 너무 컸다.
물론 위험하지는 않았던 게, 진짜 사람을 물 만한 개는 애초에 밖에 풀어놓지를 않았다. 마당에 (사람 물 만한) 개를 키우는 집은 이런 식으로 '개 조심' 표시를 해 뒀다. 이런 집은 지나갈 때마다 개가 정말 사납게 짖어댔다.
위험하지 않다곤 해도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산책을 다녀오자마자 요타에게 개가 너무 무섭댔더니, 나갈 때마다 들고 다니라며 나무 지팡이를 머릿수만큼 줬다.
조과장은 네 시쯤 퇴근해서 네 시 반에는 집으로 돌아왔다. 가끔 마트에라도 들렀다 오면 30분쯤 더 걸렸다. 엄마는 보통 네 시부터 저녁을 준비하셨다.
저녁은 거의 매일같이 고기쌈이었다. 채소는 프톨레마이다 마트에서 사 오기도 하고 나중에는 시장에서 사 오기도 했는데, 고기만은 무조건 동네 정육점에서 사 왔다.
22년 5월 그리스 가족 여행 (1): 고기 찾아 삼만리 - https://uncletokki.tistory.com/m/10
22년 5월 그리스 가족 여행 (1): 고기 찾아 삼만리
여행을 통보받은 게 4월 25일 월요일이었고, 출국은 4월 30일 토요일 자정이었다. 5월에 잡아둔 일정은 양해를 구한 뒤 취소하거나 앞당겼고, 그러느라 나는 먼저 상경해서 PCR 검사도 서울에서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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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질겨도 너무 질긴 소고기로 우릴 당황케 한 정육점이 알고 보니 돼지고기 맛집이었다(상상도 못 한 정체). 우리 가족이 기름진 부위를 선호하지 않아서 목살을 사 봤는데(목에 손날을 대고 "Pork's neck!"을 외쳤다) 정말 부드럽고 맛있었다.
곁들이 음식으로는 메테오라에서 배워오신 그리스식 샐러드나, 거기에 한국식 양념을 더한 겉절이가 번갈아 식탁에 올랐다. 무엇보다 상추! 상추가 먹어본 중 가장 맛있는 상추였다.
저녁을 먹고 나선 씻고, 못다 나눈 이야길 나누다가 하나둘 잠자리에 들었다. 부모님도 부모님이지만 조과장도 정말 이른 시간에 잠들었다. 새나라의 어른이만 홀로 남아 불 꺼진 방 안의 한 마리 폰딧불이가 됐더라는 후문.
이렇게 우리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조과장이 출근하면 조식을 먹고, 퇴근하면 다 같이 저녁을 먹는 일상을 보냈다.
그 사이가 말하자면 자유 시간이었던 셈인데, 처음에야 내가 부모님과 동행해야 했지만 바로 이튿날부터 부모님끼리 다니셨다(나는 귀국하자마자 치러야 했던 자격증 시험 준비를 했다…ㅎㅎ). 정확히는, 토마스 아저씨 차를 얻어 타고 여기저기 다녀오셨다. 여러모로 고마운 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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