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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5월 그리스 가족 여행

22년 5월 그리스 가족 여행 (1): 고기 찾아 삼만리

by 조토삼 2022. 5. 20.

여행을 통보받은 게 4월 25일 월요일이었고, 출국은 4월 30일 토요일 자정이었다. 5월에 잡아둔 일정은 양해를 구해 취소하거나 앞당겼고, 이를 처리하느라 나는 먼저 상경해서 PCR 검사도 서울에서 받았다.

그리고 출국일 저녁, 김포공항에서 우리 조소장님과 강사장님을 마중했다. 일찍 가 있는 쪽이 마음이 편할 테니 저녁도 먹지 않고 곧바로 인천공항으로 이동했다. '아무렴 인천공항인데 먹을 것쯤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는데, 오산이었다.

인천공항까지는 택시를 탔다. 긴 비행을 앞둔 부모님을 생각해 공항철도는 피했고, 코시국이라 공항리무진은 운행하고 있지 않았다.

오랜 만에 찾은 인천공항은 그야말로 상전벽해라 할 만했다. 어찌나 썰렁하던지. 마지막으로 다녀온 여행이 코로나 직전이었으니 만으로 3년이 조금 안 됐는데, 코시국이 끝나지 않았단 게 새삼 피부로 느껴졌다.

그렇게 씁쓸함을 느끼며 출국장에 들어섰더니, 인천공항의 변화는 단지 기분만의 문제가 아니라 좀 더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왔다. 그 넓은 출국장에 먹을 게 없었던 것이다.

인포 직원 분에게 물으니 던킨도넛(…), 파리바게트, 스타벅스가 있다고 했다. 그나마도 앞의 둘은 여덟 시 반까지라, 24시간 운영하는 스타벅스에서 샌드위치를 사다가 게이트 앞에서 먹었다.

간단한 요기 후 아빠는 누워 주무시고, 엄마는 내 전화기로 『결혼 작사 이혼 작곡』을 보셨다. 나는 그런 두 분을 그렸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탑승 시간이 가까워졌고, 그즈음해선 게이트 앞이 붐빌 만큼 사람이 늘어 있었다.


우리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환승해 그리스 테살로니키로 가는 항공편을 이용했다(터키항공이지만 아시아나와 제휴 중인지 아시아나 마일리지를 쌓을 수 있었다).

이스탄불까지 가는 데만 열한 시간 반이 걸렸다. 긴 비행으로 몸은 지쳤지만 인천공항과 달리 전 세계 여행객으로 붐비는 공항 풍경에 여행 기분이 나기 시작했다. 다시 이스탄불에서 테살로니키까지는 한 시간 조금 더 걸렸다.

환승하러 가는 데만 삼천 보를 걸어야 했던 이스탄불공항

 

입국 심사를 앞두고는 영어를 못하시는 엄마가 걱정돼 만반의 준비를 해드렸는데, 그 모든 준비가 무색하게도 여권을 내미는 걸로 (문답 하나 없이) 끝났다. 문제없이 잘 도착한 수화물도 찾고, 마중 나온 조과장의 차에 오르며 그리스행 비행을 마쳤다.

뒷자리까지 안전벨트를 하지 않으면 경고음이 울렸던 그리스의 현대차

 


처음 우리를 그리스로 초대할 때, 조과장은 자기가 머물고 있는 지역을 코자니Κοζάνη, Kozani라고 소개했다(구글에서 검색해 보면 "발전소가 있는 도시"라는 설명이 달려 있다).

도착하고 보니 정확히는 그보다 북쪽의 프톨레마이다Πτολεμαΐδα, Ptolemaida라는 도시, 더 정확히는 다시 거기서 조금 서쪽으로 떨어진 엠포리오Εμπόριο, Emporio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https://goo.gl/maps/7LQjg8cXegSKtwQY7

 

코자니 · 그리스 501 00 코자니

그리스 501 00 코자니

www.google.com

https://goo.gl/maps/8gh5ytzcN3KFkwAv8

 

Ptolemaida · Πτολεμαΐδα 502 00 그리스

Πτολεμαΐδα 502 00 그리스

www.google.com

https://goo.gl/maps/qTDe5eJ6fL53Yp7j9

 

Emporio · Μουρίκι 500 05 그리스

Μουρίκι 500 05 그리스

www.google.com

 

구글 지도를 찾아보면 이들 도시는 그리스 북부 내륙에 위치해 있다.

즉, 우리에게 친숙한 그리스·로마 신화나 고대 그리스 역사의 주 무대가 되는 에게해 연안이 아니라 그보다 윗지방이다.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바르바로이βάρβαροι라 불렸던, 마케도니아 사람들의 왕국이 자리했던 곳이다.

차를 타고 달리며 보는 풍경도 우리가 "그리스"라고 하면 떠올리는 바다가 아니라 끝모르고 펼쳐진 고지대의 평원과 지평선을 따라 완만하게 굽이치는 산줄기 따위였다. 첫인상은 오히려 몽골과 비슷했다.

어딘들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오래된 석조 건물이 많은 유럽은 유독 맑은 날과 흐린 날의 인상이 다른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에 도착하고 처음 며칠이 내내 흐리고 가끔 부슬비가 내렸다.

첫날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길도 흐렸는데, 주변이 탁 트인 덕인지 아니면 지대가 높아 저 멀리 운무 낀 산이 보여선지, 음산하기보다는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신화의 배경이 된 땅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길가에 노는 땅을 보고 농사 짓는 친구 분을 떠올리시는 부모님의 연상법도 흥미로웠다.


현지 시간으로 오전 여덟 시 반에 착륙했고 조과장이 우릴 픽업한 게 아홉 시쯤이었다. 숙소까지는 차로 두 시간 반쯤 걸린다고 했으니 숙소로 가면 벌써 점심 시간이었다.

문제는 그날이 일요일, 심지어 그냥 일요일도 아니라 5월 1일 노동절이라는 점이었다. 다음 날도 대체 휴일이라 연휴를 맞아 식당은 물론이거니와 대형마트도 대부분 운영하지 않았다. 찾아보면 하는 식당이야 없겠느냐마는, 긴 비행 끝에 이역만리 타국에서 일하는 아들을 만난 엄마는 손수 밥을 해 먹이고 싶어하셨다.

운전하는 조과장을 대신해 내가 구글 지도로 프톨레마이다의 슈퍼 몇 개를 검색하고 길을 안내했다.

슬럼이 떠오르는 프톨레마이다 골목

왠지 슬럼을 연상케 하는(알고 보니 도시 외각이었다) 프톨레마이다의 골목을 쏘다니며 슈퍼 몇 군데에 들렀으나 엄마가 찾으시던 고기와 신선한 쌈채소는 찾을 수 없었다. 채소야 아무거나 쌈장 찍어 먹으면 된다지만 고기가 없는 건 치명적이었다.

우선 체크인부터 하고 집주인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구글 지도가 안내하는 대로 나선 길, 길가에 보이기에 별 기대없이 들른 이웃 마을 아나락시(?)Αναρράχη, Anarrachi의 슈퍼에서 정육점에 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슈퍼에도 정육 코너가 있긴 했지만 햄밖에 취급하지 않았다.

주인 아저씨가 친절했던 Αναρράχη의 슈퍼

주인 아저씨는 영어 단어 몇 개를 알았고 소통에도 적극적이었지만, 끝내 "Not ham, fresh meat"를 알아듣지는 못했다. 구글 번역기까지 동원한 끝에 주인 아저씨가 구글 지도의 한 지점을 손으로 직접 짚어 줬다(즉, 등록돼 있지 않았다).

마침 숙소 바로 옆 골목이라 들어가는 길에 들러봤지만 크게 돌아봐도 정육점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원래 계획대로 집주인에게 물어보기로 하고 우선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Villa Kastanodasos라는 곳이었다.

https://goo.gl/maps/3DW8wFHw2KFkJAfy8

 

Villa Kastanodasos · Emporio Kozanis, Embórion 500 05 그리스

★★★★★ · 호텔

www.google.com

워낙 작은 마을이라 다른 숙소가 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길에서 만난 동네 어르신들도 "거기서 묵지?" 하고 물을 정도였으니 동네 대표 숙소 아니었을까?

부모님은 사진 왼쪽 방을 쓰셨고, 나와 조과장은 다락방을 이용했다.

다락방이라곤 하지만 넓고 천장도 높은 데다 볕까지 잘 들어서 이용하기에 불편하지는 않았다. 다만 사다리가 접이식이라 안정감이 떨어지고, 경사도 잠결에 화장실 가다가 실족할까 겁이 날 만큼 가팔랐다. 형과 나는 짐을 모두 1층에 풀어놓고 다락에선 잠만 잤다.

집요정 조비가 머물렀던 다락방

부모님이 짐을 푸시는 동안 나와 조과장은 다시 한번 정육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집주인 토마스 아저씨가 구글 지도를 확대해가며 정확한 위치까지 짚어 줬겠다, 초등학교 앞을 지나듯 기어가는 속도로 골목을 달리다 보니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간판이 보였다.

어? 저거 아니가?

 

모름지기 정육점이라면 돼지라도 한 마리 그려두는 게 국룰 아닌가

모름지기 정육점이라면 간판에다 돼지라도 한 마리 그려두는 게 국룰 아닌가 싶다가도, 여긴 한국이 아니라 그리스이니 국룰도 다를 수 있겠다 생각했다(나중에 찾아보니 간판에 쓰인 ΚΡΕΟΠΟΛΕΙΟ가 정육점이란 뜻이었다).

마스크가 없었던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조과장만 들어가 스테이크용 소고기를 1kg 사 왔다. 가까이 도축장이라도 있는지 아주 신선한 소고기였다. 고기를 받아들고 잔뜩 흥분하신 엄마는 전기팬에 후라이팬까지 동원해 그 자리에서 1kg을 전부 구워버리셨는데,

보기와 달리 너무 질기더라는 후문… ㅎ

뒷날 이 정육점은 우리 단골집이 되고 이 집 아들 룸파스는 내 친구가 되는데, 이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