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오피스텔 724호에서 술로 맺어진 다섯 아재들에게 올해는 뜻깊은 한 해였다. 늦다면 늦은 나이에 하나둘 취직을 해나간 지 수년, 드디어 올해 전원 백수 탈출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연초에 내가 일을 구하자마자 우리 모임의 허리를 맡고 있는 셴짜이가 추진한 게 바로 여행계契였다. 돈이 어느 정도 모이길 기다리느라 날짜는 연말로 잡았다.
도저히 시간을 내지 못한 재팡이가 중도 이탈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행 준비는 순조롭게 이뤄져갔다. P 호소인 셴짜이의 영도領導 아래 여름에는 비행기표가 예약돼 있었고, 숙소나 식당도 여행이 가까워지면서 하나둘 예약을 잡아나갔다.
여행 계획이란 걸 세우질 않는 나로선 퍽 신선한 경험이었다. 나머지도 크게 다르진 않아서, 디케이 정도나 "뭘 하고/먹고 싶다"고 의견을 냈을 뿐, 그냥 셴짜이가 가자는 대로 따라다녔다(식당 예약을 맡은 디케이는 제가 예약한 곳이 무슨 식당인지도 모르더라).
인터넷에서 사람마다 다른―특히 J와 P―여행 스타일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던데, 어쨌든 제때 목소리를 내지 않았거든 군말 없이 잘 따라다니기만 해도 분란은 생기지 않는다. 여행만이 아니라 세상 이치가 대체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출국은 12월 7일 이른 아침이었다.
그 한 주 전의 사전 회동에서 셴짜이를 빼고 출국일과 장소를 정확히 아는 놈이 한 놈도 없더란 사실이 밝혀졌던지라, 새벽부터 불신 가득한 눈으로 서로의 동태를 챙겼다. 덕분에 한 사람도 늦지 않고 김포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체크인을 하고 수하물을 맡기는데 띵거가 "보조 배터리는 수하물로 부치면 안 되지?" 하고 물었다. 내가 또 공항에서 일하는지라, 확신을 갖고 그렇다고 말해줬다.
그리고 내 짐에서 보조 배터리가 나왔다.
그 뒤로도 제주도에 다녀오면서 사전 등록을 해뒀다며 호기롭게 줄을 따로 섰던 디케이가 빠꾸를 먹고 우리보다 늦게 들어오거나(국내선과 국제선은 별개라고 한다), 라운지로 커피를 가지러 간 셴짜이가 동반 1인이라며 띵거를 데리고 갔다가 띵거가 빠꾸를 먹는 등(아니었다) 사소한 일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누구 한 사람 잡혀가는 일 없이 비행기에 올랐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일본행行 비행기는 과장 좀 보태서 눈 감았다 뜨면 도착한다. 아시아나식式으로 말한다면 기내식 받아서 먹고 나면 도착한다고 해야 할까.
새벽부터 부산을 떠느라 허기졌던 점을 감안하더라도 기내식은 썩 괜찮았다. 고추장―이라 쓰고 맛다시라 읽는다―이 신의 한 수였다.
몇 년 만에 방문한 일본은 제법 달라진 모습으로 날 맞이했다. 관광객은 우선 지문을 등록해야 했고, 그 지문으로 입국장을 통과할 수 있었다(……뭔가 좀 이상하지만 다 쓸데가 있으니 수집했겠지). 출국할 때도 다시금 느꼈지만, 전보다는 전산화가 많이 이루어진 듯.
첫날 행선지는 교토였다. 예약 담당 디케이의 첫 임무가 교토행 하루카(고속 열차) 예약이기도 했다.
일본에 도착하고 나서는 일본어 능력자 디케이가 앞장설 예정이었다. 그러나 일본어 말곤 길잡이로서의 거의 모든 자질이 부족하다는 게 금방 탄로 나서, 그나마 알아보고 온 셴짜이와 함께여야 제대로 기능할 수 있었다.
공항과 이어진 열차 승강장에서도 둘이서 키오스크에서 한참을 씨름하더니 표 넉 장을 만들어 왔다. 출발 시간이 곧이라 서둘러 내려갔고, 잠깐 기다리자 카와이한 열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차량이 이렇게 생기진 않았다고 한다. 이 차량을 타려고 덕후들은 일부러 시간을 맞추기도 한다는데, 우리가 이 차량에 오르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라고, 등받이의 키티 사진을 찍으며 디케이가 말했다.
고속 열차답게 교토까지는 금방이었다. 도착해서는 첫 끼니로 라멘을 먹기로 돼 있었다. 기가 막힌 메뉴 선정이었다.
오사카 날씨가 따뜻할 거라기에 옷차림을 가볍게 하고 온 참이었다. 그런데 비행기 안이 생각보다 춥고 건조한 편이라 몸이 좀 식은 상태였다. 라멘 국물이 간절했다.
https://maps.app.goo.gl/HiMKjg2yPF9fJo4J7
카이다시멘 키타다 · 570-3 Kitafudodocho, Shimogyo Ward, Kyoto, 600-8233 일본
★★★★☆ · 일본라면 전문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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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도 역에서 멀지 않았다. 우리 앞에 한국인 4인 가족이 이미 서 있었고, 우리 뒤로도 줄은 계속 늘어났다. 우리 바로 뒤엔 중국인 커플이 섰는데 안내를 하러 나온 직원에게 중국어로 무어라 말을 걸었다.
평소라면 모르고 지나쳤을 말이지만, 마침 우리에겐 칭화대를 나온 띵거가 있었다. "우리는 다 넷이고 자기들은 둘이니까 먼저 들어갈 수 있냐고 묻네." 어딜 감히.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자판기 형태의 주문대가 있었다. 이미 메뉴판을 (씹고 뜯고 맛)보고 들어왔기에 주문은 디케이의 손으로 신속하게 이뤄졌다. 디케이는 습관적으로 맥주도 네 병 주문했고,
우리는 큼직한 맥주 네 병을 받아들었다. 감기에 걸렸던 셴짜이는 차분하게 자기 몫의 따뜻한 물도 주문해 달랬고, 디케이는 어딘지 삐걱대는 의사소통 끝에 따뜻한 물을 얻어낼 수 있었다. 손 씻는 물이라도 담은 양, 웬 사발로.
맥주와 사발로 한바탕 웃긴 했지만, 라멘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띵거와 디케이는 중화 소바라고 하는 일반적인 라멘을 시켰고, 나와 셴짜이는 조개류로 국물을 우린 라멘을 시켰다(당장 가게 이름의 '카이다시貝出し'가 조개 맛국물이란 뜻이다).
면이 가늘었고, 조개를 우린 국물은 시원했다. 먹자마자 감기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조금 먹다가 나중에 곁들인 산초 가루는 맛의 개성을 더했다.
https://blog.naver.com/purplebeat/223295606353
<카이다시멘 키타다 / 교토> - 어패류 육수가 맛난 라멘집! feat. 기요미즈데라 청수사
724에서 매달 곗돈을 들어 여행을 가게 되었다. 장소는 다름아닌 오사카. 전원이 참석하진 못하고 우국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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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동안 먹은 음식에 관한 한 셴짜이의 블로그를 참고하자. 약은 약사에게, 밥과 술은 셴짜이에게.
숙소는 미마루라는 곳이었다. 라멘집에서도 느꼈지만 교토는 관광지답게 직원 중에 일본어를 잘하는 외국인이 꼭 있었다. 우리를 안내한 건 베트남 사람이었는데 영어도 곧잘 했다.
숙소는 전반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큰 침대가 하나 있었고 다다미 공간도 크게 있었다.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은 외국인들이 만족할 만한 곳이라고 느꼈다. 다만 처음 안내받은 방에서 빨래 덜 말린 냄새가 나서 방을 한번 바꾸긴 했다.
방에서 조금 쉬다가 청수사清水寺, きよみずでら로 나섰다. 기원은 잘 모르겠지만 일본에서 유명한 절이라고 했다. 언덕을 따라 관광객으로 가득한 상점가가 한참을 이어지는데 우리는 택시로 편하게 이동했다.
올해는 가을이 유난히도 빨리 지나가버렸는데 청수사엔 아직 가을이 머물러 있었다. 사진을 찍는 재미가 있었다.
수상할 정도로 일본 문화에 정통한 디케이가 청수사의 무대舞台에 관한 속담을 일러줬다. 저기서 뛰어내려 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어서, "키요미즈데라(청수사)의 무대에서 뛰어내리다(清水の舞台から飛び降りる)"라고 하면 "배수의 진을 치다"와 비슷한 의미라나. 죽을 각오로 임한다, 이 말이렷다.
저녁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서 카페에 한 곳쯤 들르기로 했다. 상점가에서 파는 주전부리도 먹어볼 겸 청수사 주변의 상점가에서 우선 찾아봤는데 자리가 난 곳이 없었다. 그대로 카페를 찾아 청수사에서 점점 멀어졌다.
https://maps.app.goo.gl/XcYvSzZVvmZnz6aW9
기온 니시 카페 · 21-2 Tsukimicho, Higashiyama Ward, Kyoto, 605-0829 일본
★★★★★ ·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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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이곳에 자릴 잡았다. 1층에선 꽤 비싸보이는 식당을, 2층에선 카페를 함께 운영하는 것 같았다. 우리 말곤 기모노를 입은 여자 두 분이 먼저 앉아 있었다.
청수사 주변이니 관광객이겠거니 했는데, 수상할 정도로 일본 문화에 정통한 디케이가 부연하길, 아마 요정料亭에서 일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고 했다. 카페 이름에도 들어간 기온祇園이라는 지명부터가 유곽촌을 뜻한다고.
따뜻한 커피로 식은 몸을 덥혔다. 함께 나온 과자도 아주 맛있었다. 그릇에도 조예가 깊은 셴짜이가 말하길, 그릇도 '아주' 비싼 애들이라고. 그러고 보면 벽면 하나를 아예 에르메스 상자로 채우긴 했더라.
동선에 신사가 하나 있기도 해서 조금 일찍 카페를 나섰다.
신사는 보기에 퍽 이뻤지만 어디서 굴러먹던 전범戰犯을 기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라 빠르게 돌아보기만 했다. 경주 십원빵을 현지화했다는 십엔빵(가치가 열 배라 괜히 진 기분…)이 인상적이었다.
https://maps.app.goo.gl/S6wkkoivzHjyqTZh7
우즈라야 · 일본 〒605-0079 Kyoto, Higashiyama Ward, Tokiwacho, 二丁目177-1
★★★★☆ · 꼬치구이 전문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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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야키토리집이었다. 우리는 가장 안쪽에 앉았고, 덕분에 주인장이 조리하는 과정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주문은 수상(…)한―너무 기니까 줄이자―디케이가 도맡았다. 정확히는 셴짜이가 고르고, 디케이가 가게에 전했다. 일본어를 읽을 줄도 모르는 셴짜이가 일단 읽어주기만 하면 그 부위나 요리가 뭔지 바로 알아채는 게 신기하고 재밌었다. 말이 다른데도 통하다니, 문화가 곧 하나의 언어처럼 기능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대강 이런 것들을 먹었다. 하나같이 맛있었다. 무얼 어떻게 먹었는지에 관해선, 음식은 누구?
https://blog.naver.com/purplebeat/223296050813
<우주라야 / 교토> - 기억에 남을 야키토리집!
이어서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기대를 했던 우주라야. 맨날 술에 취해 있는 우국선생을 회초리 때려서 예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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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을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 탄수화물로 자리를 마무리하고(볶음밥은 안 팔더라),
미리 알아봐둔 사바즈시(고등어 스시)를 포장하러 기분 좋게 밤거리로 나섰다. 마침 숙소로 가는 길에도 매장이 하나 있기에 그리로 향했는데 알고 보니 백화점 식품관이어서 이미 문을 닫았더라.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청수사로 나오는 길에 봐둔 술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정작 가보니 주인장의 응대가 썩 맘에 들지 않아서 그대로 돌아나왔고, 상할 대로 상한 수상한 디케이의 기분을 달래려 선술집 한 곳엘 들렀다(선술집이 타치노미야立ち飲み屋, 즉 서서 마시는 술집이란 말인 줄 이날에야 알았다).
로컬들이나 찾을 법한 한산한 가게였는데, 수더분한 사장님의 응대 덕에 수상한 디케이의 상한 기분도 금세 풀렸다.

이것저것 시켜 먹고,

숙소로 돌아와 맥주를 더 마시고 잠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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