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10월 필리핀 마닐라 1박 2일 여행
필리핀 마닐라에 가게 됐다. 필리핀은 처음이었다. 여행지로 유명한 세부도 아니고 마닐라로 가게 된 이유는 마닐라로 가 있는 지인에게서 초대를 받아서였다.
작년 5월에 그리스에 다녀온 뒤 첫 해외여행이었다. 더 이상 '가진 게 시간밖에 없는' 사람이 아니게 돼 버려서 이번 여행은 휴일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오전 근무를 마치자마자 떠나서 이틀을 꽉 채워 보내고 돌아와 다시 오후 근무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나마도 공항에서 일하고 있으니 소화 가능한 일정이었다. 일을 마치고 셔틀버스에 오르는 것만으로 여행의 첫발을 뗄 수 있었으니까.
저녁을 먹고 온라인 체크인을 한 뒤 탑승권을 받았다. 짐이라곤 책가방 하나가 전부라 수속은 금방이었다. 가방 안에는 현지에서 메고 다닐 작은 가방(마트료시카?)과 갈아입을 옷가지, 전자책 단말기 정도만 들어 있었다.
표지판을 따라 게이트로 이동하는데 가는 길이 어쩐지 눈에 익더라니, 몇 년 전 몽골행 비행기를 타러가던 길과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우연이 반가워서 함께 다녀왔던 친구에게 사진까지 보내가며 호들갑을 떨었다.
체크인할 때 자리를 고를 수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잘 돌아다니지 않기도 하거니와 이번에는 비행 시간도 길지 않아서(네 시간) 창가 자리를 골랐다.
이륙이 10분 연기됐다던 비행기는 결국 20분 늦게 떴다. 그대로 한 시간쯤 자다 깨니 기내식 시간이었다. 어디선가 시차 적응을 잘하기 위해서는 비행기 안에서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들었지만, 시차가 고작 한 시간이라 그냥 먹었다.
기내식은 소고기와 돼지고기 두 종류. 나는 돼지고기 안심 볶음을 골랐다. 인천발이라선지 필리핀항공인데도 김치가 있었다. 심지어 직원 식당 김치보다도 맛있더란 후문. 농협 제품이었고, 뒷면을 보니 재료도 죄다 국산이었다. 역시.
밥을 먹고 나서는 까뮈의 《이방인》을 읽었다. 그리 길지 않아서 금방 읽을 수 있었다.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읽으면서는 함께 다루면 좋겠다고 여겼는데, 이쪽을 다시 읽고 나선 그 기획을 폐기했다. 두 작품이 소재(이해받기 어려운 동기를 가진 개인의 범죄)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둘 다 읽고 보니 〈화양연화〉와 〈헤어질 결심〉만큼도 비슷하지 않았다.
이어서 《동물농장》까지 읽으려다가 관두고, 그냥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주로 독후감과 여행기에 관한 구상들이었다(그렇다, 이번 여행은 작정하고 왔다). 창밖 저 아래 바닷물은 찰흙 같은 질감으로 멀리서 수평선이 흐리게 뭉개지도록 넓게 깔려선 차라리 낯선 뭍처럼 보였다.
그렇게 한 시간쯤 더 지나 착륙했다. 현지 시각 23시 53분, 기온은 27도.
마중 나온 지인을 따라 곧장 숙소로 이동했다. 동남아에서는 그랩이라는 앱이 널리 쓰인다고 했다. 카카오택시나 우버 비슷한 것이라는데, 카카오택시와 마찬가지로 전화번호 인증이 필요했다. 내가 가져간 심카드는 번호가 없어서 나는 이용하지 못했다.*
(*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에서 설치하고 인증까지 해 가면 이용할 수 있다고 하더라)
숙소는 보니파시오 글로벌 시티Bonifacio Global City, BGC라는, 수도 마닐라에서도 가장 번화한 동네에 위치해 있었다. 이 동네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BGC 하이 스트리트가 유명하다고 해서 첫날은 이 길을 따라 돌아다니기로 했다.
새벽 다섯 시까지 맥주를 마시다 잠들었지만 여행지에선 없던 힘도 생기는 법. 열 시 좀 넘어서 숙소를 나섰다.
우선 카페에 앉아 (카페인을 보충하며) 식당부터 찾아보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식도락에 큰 관심이 없지만, 여행까지 나왔으니 뭔가 특별한 걸 먹어보고 싶었다. 다만 무엇이 특별한지는 사람마다 다를 텐데, 내 경우에는 주로 로컬들이 즐기는 음식을 맛보는 데 끌리는 편이다.
우연히 알게 된 현지인에게 졸리비Jollibee라는 패스트푸드 음식점을 추천받고, 가장 가까운 지점을 찾아 방문했다.
직접 가서 먹어보고 받은 인상은 '필리핀의 김밥천국'에 가까웠다. 김밥천국만큼은 아니지만(그러기도 쉽지 않다) 메뉴가 충분히 다양했고 가격도 저렴했다. 나는 스파게티와 치킨 한 조각 세트를 시켰다. 점심때라 그런지 사람이 많은데도 선 자리에서 음식을 곧바로 받을 수 있었다.
스파게티는 달짝지근한 게 퍽 귀여운 맛이었다. 어렸을 적 경양식집에서 먹었던 (파스타가 아니라) 스파게티와 맛이 비슷했다. 치킨은 조각도 큼직하고 KFC처럼 기름진 맛이 났다. 별미는 아니지만 과연 현지인들이 일상적으로 먹을 만한 음식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선 본격적으로 하이 스트리트를 구경했다.
마켓!마켓!이라는 커다란 쇼핑몰과 샹그릴라호텔을 동서 양끝에 두고, 그 사이 가운뎃길을 서너 블록이나 터놓고 가장자리를 따라 커다란 쇼핑몰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었다. 쇼핑은 즐기지도 않―고 사실 즐길 만한 돈도 없었―지만, 주요 쇼핑몰을 죄다 찍먹하며 동서를 가로질렀다.
알고 보니 10월까지는 우기였다. 걷다 보면 간헐적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빗발이 굵어지진 않고 곧 그쳤다. 우기가 길어선지, 상가마다 길쪽으로 보행객이 비를 피할 수 있도록 패널로 지붕을 덧대는 게 일반적이었다. 나도 빗방울이 떨어질 때면 그 아래를 걸었다.
비는 내리지 않았어도 동남아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더위는 명불허전이었다. 한창때가 지나선지 한국처럼 뙤약볕이 내리쬐진 않되 내내 습했다. 날씨에 이런 표현이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착실하게 더위를 더해간달까.
한두 시쯤 되자 더위도 절정이었다. 끈이 몸통을 가로지르는 가방을 메고 다녔는데, 나중에 벗어보면 가방끈 자리를 따라 땀자국이 나 있었다.
틈틈이 카페에 들르거나 길거리 음료를 사 마시며 땀으로 흘린 수분을 보충했다. 사진은 신기해 보여서 샀던 용과 주스.
마켓!마켓! 옆엔 대규모 지프니 정류장이 있었다. 미리 알아보지 않아서 저게 지프니라고 불린다는 것도 현지인에게 물어보고서야 알았다. 차마다 개성적으로 꾸며두고, 에어컨이 없는지 창문은 물론 뒷문까지 열어두고 달리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기회가 있었다면 타봤을 텐데, 아쉬웠다.
한낮엔 이랬다가,
해 질 녘엔 이렇게 됐다. 서너 시부터 거리에 사람들이 늘어나더니, 다섯 시부터는 (악명 높은) 교통난이 시작됐다.
석양을 뒤로 하고, 일대를 크게 돌았다.
여기가 종로인지 마닐라 타구이그인지 헷갈리게 하는 주마닐라 한국 대사관을 지나,
아마도 필리핀의 현대사가 켜켜이 쌓였을 마닐라의 달동네를 지났다. 가파른 언덕길을 따라 저들 건물은 그야말로 '쌓여' 올라가는데, 자료 사진에서나 보던 우리네 판자촌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필리핀은 교통난보다도 빈부격차로 유명한 나라다.
필리핀에서 농구는 그 어떤 스포츠보다도 인기가 많다고 들었다. 달동네 한가운데에도 저만한 공터가 온전히 농구 코트로 비워져 있었다. 저기서 밤마다 농구 시합은 이뤄지고 있나 보다.
언덕길을 따라 오르며 왼편으로는 이런 풍경들이 이어졌고, 고개만 뒤로 돌리면 오른편으로 커다란 쇼핑몰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었다. 둘 사이에는 차가 달리면 사람과 자전거 들이 서로를 스치지 않도록 곡예를 펼쳐야 하는 좁은 길이 전부였다.
원래 이틀을 계획했지만, 세상사 어디 뜻대로만 되던가. 하루 만에 마닐라를 떠나게 됐다. 다행히 그날 밤 비행기 표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다만 공항까지 가는 게 문제였다. 수중에 현금이 없었던 데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자니 바가지가 걱정스러웠다.
스타벅스 직원에게 택시가 카드를 받느냐고 물으니, 잘 받지 않는다며 그랩을 추천해 줬다. 그랩을 쓸 수 없다고 하자 대뜸 대신 잡아주더라. 책정된 금액이며 ATM 위치까지 알려주기에, 고마운 마음에 돈을 뽑는 김에 조금 더 뽑아 팁으로 건넸다(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돈으로 2,500원 정도였더라, 환율 정도는 알고 가자…).
공항까지는 금방이었다. 그랩 기사 에르윈도 붙임성 좋고 유쾌한 사람이어서, 아재끼리 '옛날 취향'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취향이 고급지지 못해서 미술도, 음악도, 심지어는 음식도 잘 모른다. 그런데도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거기에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활이 있어서인 것 같다. 여행지에서는 (나 같은 INFP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뻔뻔하게 말을 건넬 수 있고, 그들도 여행자에게는 더 친절을 베풀게 된다. 그게 여행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여행은 (셔틀)버스로 시작해 버스로 끝났다. 여행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비행기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또 만만찮다. 여행의 뽕마저 다 빠진 뒤 잊고 있던 현실이 (이자까지 쳐서) 몰려드는 느낌이랄까.
영종도살이의 매력은 비행기에서 내려 30분이면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하루 일찍, 그것도 새벽 여섯 시에 도착하는 바람에 룸메를 놀라게 하긴 했지만(미국이었다면 총을 맞지 않았을까?).
이곳에 사는 동안 가능한 한 많이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