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읽다

총, 균, 쇠_재레드 다이아몬드

조토삼 2023. 3. 28. 12:18

마크 트웨인이 그랬다던가, "고전은 모두가 칭송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라고. 그렇다면 《총, 균, 쇠》도 고전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 정도는 충족한 듯 보인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봤지만, 정작 읽어 본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우니까.

서점에서 이 책을 보면 큼직하게 인쇄된 제목과 함께 강렬한 색상의 띠지부터 눈에 띈다. 내용은 "서울대 도서관 최다 대출 기록 도서" 정도로 기억한다. 그래서 지인 중 한 사람은 서울대 출신을 만날 때마다 이 책을 읽어 봤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읽은 사람도 거의 없었거니와 읽었다고 하는 사람도 내용을 물으면 제대로 답을 못 하더란다.

나도 도서관에서 두어 번 도전해본 적이 있지만 매번 얄리의 질문으로 시작하는 도입부를 넘지 못했노라 고백했다. 그래도 도입부나마 읽은 게 기특했는지, 다음날 생일 선물로 이 책을 사 주더라(다 읽고 나면 다음에는 《코스모스》를 사 주겠다고 했다).

그게 작년 연말이었고, 연초에 새해 계획으로 '한 달에 책 한 권씩, 두꺼운 책은 따로 분기당 한 권씩' 읽기로 하면서 《총, 균, 쇠》를 1/4분기 책으로 정했다. 2월 28일에 다 읽었으니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이 책은 학술 조사차 뉴기니에 머물던 저자에게 얄리라는 원주민 친구가 건넨 질문에서 출발한다: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당신들처럼] 그런 화물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저자는 얄리의 질문을 이렇게 재구성한다: "인류의 발전은 어째서 각 대륙에서 다른 속도로 진행됐을까?"

짐작건대 얄리와는 전혀 다른 의도였겠지만, 이 질문은 그동안 수없이 많이도 던져져 왔다. 이에 대한 가설적 '주장'도 여럿이  있어 왔다. 저자는 이를 추려 몇 가지로 소개하고 있으나, 내게는 딱 둘로 읽혔다: 노골적으로 솔직하거나, 온정주의로 솔직하지 못하거나.

저자는 이들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친절하게도 자기 견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해 준다: "민족마다 역사가 다르게 진행된 것은 각 민족의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환경적 차이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적으로는 아득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공간적으로는 (남극 대륙을 제외한) 모든 대륙을 망라하는, 그야말로 위대한 지적 여정을 시작한다.


유튜브에 온갖 분야의 전문가들이 올린 리뷰 영상이 수두룩하니, 조악한 내용 요약을 더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다만 시간이 허락한다면 한 번쯤 직접 읽어보십사 권하고 싶다. 《총, 균, 쇠》의 묘미는 (흥미로운) 가설 자체보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이를 증명해 나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어울리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논리 전개가 아주 '흥미진진'하다.

이와 관련해서 (또 다른 고전인)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을 인용한 부분이 아주 인상 깊다. 최근 인터넷에서 '인상적인 소설의 첫 문장' 따위로도 잘 알려진 인용구를, 저자는 이렇게 풀이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이 문장에서 톨스토이가 말하려고 한 것은 결혼 생활이 행복해지려면 수많은 요소가 성공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행복에 필요한 이 중요한 요소들 중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어긋난다면 그 나머지 요소가 모두 성립하더라도 그 결혼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 법칙을 확대하면 결혼 생활뿐 아니라 인생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우리는 흔히 성공에 대해 한 가지 요소만으로 할 수 있는 간단한 설명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중요한 일에서 성공을 거두려면 수많은 실패 원인을 피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다음 문장은 이렇다: "이러한 '안나 카레리나의 법칙'은 인류사에서 지극히 의미가 중요한 동물의 가축화에 대해 설명해 준다." 대형 포유류의 가축화뿐 아니라 야생 식물의 작물화도 마찬가지, 저자는 왜 어떤 지역에서는 (이른바) '문명' 발전을 촉발하는 요인들이 발생하기 어려웠는지 설명한다.


책은 총 네 개 부로 이뤄져 있는데, 마지막 4부에서는 앞선 부들에서 전개한 논리를 실제 사례에―즉, 각 대륙에 적용해 본다. 여기까지 흥미롭게 읽어 오던 나는, 4부의 첫 장(15장)에서 생각지도 못한 감동을 느꼈다.

15장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를 두고, 왜 인접한 뉴기니와 달리 오스트레일리아는 '후진적'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는지 분석하는 장이다. 뉴기니의 가장 큰 섬은 오스트레일리아 해안에서 16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 실제로도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의 섬들 사이에 정기적인 교류가 있었는데도 "어째서 뉴기니의 문물들은 오스트레일리아에 전해지지 않았을까?"

토러스 해협에 존재했던 이 같은 문화적 장애물이 놀라운 일로 비치는 까닭은 오스트레일리아 해안에서 16km 거리에 집약적 농업과 돼지가 있는 제대로 된 뉴기니 사회가 상상되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사실 케이프요크[오스트레일리아 해안가 지역]의 원주민은 뉴기니 본토인을 본 적도 없었다." 뉴기니 사회의 문화는 (뉴기니에서) 인접한 섬에서부터 전파돼 나갔고, 섬들을 거치며 상당히 약화됐다. 저자는 이를 두고 낱말 하나를 한 사람씩 다음 사람에게 전하는 '전화 놀이'에 빗대 표현한다. 여러 사람을 거치며 원래 낱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기 마련인 것이다. 게다가 그러는 사이에 기후와 환경마저 달라지니, 문화가 온전히 전해지기는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오스트레일리아도 넓고 뉴기니도 넓"은 것이다.

위 인용구에서 특히 '상상'이라는 단어가 깊이 와닿았다. 우리가 서로에게 가지는 오해와 몰이해는 어쩌면 우리가 충분히 상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닐까? 《총, 균, 쇠》가 위대한 까닭은 타자에 대한 이해를 가능케 하는 그 상상력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바라건대 우리가 서로를 더 잘 상상할 수 있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