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5월 그리스 가족 여행

22년 5월 그리스 가족 여행 (4): 프톨레마이다 수요장, 치포로 시음

조토삼 2023. 11. 22. 18:33

수요일은 토마스 아저씨 차를 얻어타고 프톨레마이다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여느 날처럼 조과장을 먼저 출근시키고, 우리는 여덟 시에 식당으로 내려갔다.

아침을 먹고 있으니 토마스 아저씨가 느긋하게 들어와 커피를 마셨다. 평소에는 그날 뭘 할 건지부터 묻는데, 이날은 프톨레마이다에서 갈 만한 곳을 추천해 줬다. 마침 수요일마다 시장이 들어선다고 해서 가 보기로 했다.

프톨레마이다까지는 차로 30분 정도 걸렸다. 우리가 그리스를 찾은 5월은 (아마도) 유채꽃이 절정이어서 고지대 평원 곳곳이 유채꽃밭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이는 개나리나 진달래와는 또 다른 봄 풍경이었다.

가는 길에는 아저씨가 이런저런 이야길 해 줬는데, 십여 년 사이에 동네 인구가 많이 줄었다는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우리도 도농 격차가 심각한 문제이지만, 그리스의 경우 젊은이들이 대도시로 몰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유럽 국가로 떠나버린다고 했다.

지난 19년에 차를 몰고 프랑스와 독일, 스위스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는 마냥 신기하고 즐거웠지만, 세상사 그리 단순하진 않다는 거겠지.


첫 행선지는 뜬금없게도 토마스 아저씨네 회사 사무실이었다.

토마스 아저씨는 토목 분야에서 오래 일했다고 했다. 한때 동료들과 만든 회사를 지금은 각자의 아들딸과 사위, 며느리 들에게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났는데 그래도 가끔 "도와줘, 토라에몽" 하면 돕기도 한다고. 내가 보기엔 가만 있자니 손이 근질근질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옆에서 보면 어찌나 기운이 왕성하시던지.

어쨌든 아저씨 이야길 듣고 우리 조소장님이 눈을 빛내시며 "I was a civil engineer, too!" 하셨다. 은근슬쩍 구력(?)도 견줘 보셨는데, 40년이나 현장에서 뛰었다는 토마스 아저씨에겐 안 되셨다. 사실 아저씨 쪽이 나이가 두 살 더 많기도 했다.

토마스 아저씨의 아들딸과 사위를 소개받고 나서는 우리 가족끼리 보내는 시간이었다. 아저씨는 시간이 맞으면 돌아갈 때도 태워주겠노라 했지만 버스 정류장 위치만 물어보고 말았다.

죽은 거 아님

봄 날씨가 완연했고 거리에는 개들이 팔자 좋게 누워 있었다. 우리는 아저씨가 일러준 대로 수요장이 열리는 광장으로 곧장 이동했다. 길은 내가 앞장서서 찾았는데, 엄마아빠는 아들이 (당시) 서른둘 먹도록 이렇게 길을 잘 찾는 줄은 몰랐다며 새삼 놀라셨다.

이런 게 여행의 재미지

장보기는 엄마가 도맡아 하셨다. 가격이 저렴해서 흥정 한 번 않고 그냥 달라는 대로 내주신 게 전부지만, 이제 엄마는 '그리스에서 장을 본' 사람이 되신 셈이었다. 이런 게 여행의 재미지.

채소와 과일을 잔뜩 사갖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광장에 웬 석상이 하나 서 있었다. 검색해 보니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오른팔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장군의 석상이었다. 프톨레마이다라는 도시 이름부터가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딴 것이라고 한다. 이 사람이 나중에는 이집트로 넘어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시조가 됐고, 그 후손이 클레오파트라란다.

아빠는 당신이 찍으신 사진마다 저런 식으로 기록을 해두셨다

사진 속 오른쪽에 작게 보이는 버스 정류장은 작은 골목에 위치한 게 꼭 읍내 버스 정류장을 보는 것 같았다. 물론 큰 시외버스 터미널은 따로 있었고, 여기선 프톨레마이다를 중심에 두고 가까운 마을들을 오가는 버스들만 서는 것 같았다.

버스 시간표

그리스에서 머물며 그리스 문자 읽는 법을 간단히 익혔다. 그 영향을 받은 로마자와 글자를 상당수 공유하고 있어서 대응하는 로마자가 없는 녀석들만 외우면 됐고, 그나마도 수학 시간에 기호로 접한 녀석들이 많아서―시그마, 파이 등―낯설지(는) 않았다. Π(파이, 우리가 아는 π는 소문자)가 p 소리가 난다거나 Σ(시그마)가 th 소리가 난다거나 하는 식으로 외우되 p처럼 생긴 Ρ(로)가 r 소리가 나는 등 특이한 것만 외워주면 된다.

그렇게 외운 알파벳으로 첫 번째 줄에서 ΕΜΠΟΡΙΟ(엠포리오)를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아마 열두 시 차를 탔을 것이다.

평일 이른 시간이라 여러 프톨레마이다 위성 마을(?)의 나이 지긋한 주민들이나 타겠거니 했는데, 견학이라도 다니는지 중고등학생들도 단체로 타고 내렸다. 국적을 불문하고 그 나이대 아이들은 버스 안에서도 저들끼리 즐겁구나 느꼈더랬다.


엄마가 점심을 준비하시는 동안 아빠와 나는 고기를 사러 정육점에 다녀왔다. 첫날에는 부모님 또래의 부부가 가게를 보고 있었는데, 그 뒤로는 줄곧 그 집 아들이 우릴 맞더라. 이름은 룸파스, 우리 가족끼리는 그를 "룸빠"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룸파스는 큰 도시 식당에서 일하다가 최근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님의 일을 돕고 있다고 했다.

전날 룸파스가 한국 영화를 재밌게 봤다고, 특히 〈내부자들〉 같은 범죄 영화에서 소주를 마시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고 했었다. 그래서 그날은 아빠가 한국에서 챙겨오신 소주를 몇 병 선물했다. 룸파스는 연신 고맙다고 하다가, 잠깐 기다려 보라더니 웬 술병을 하나 내왔다.

병은 무시하자, 우리 어릴 적 델몬트 병쯤 되는 녀석인 것 같다

소개하길 치포로τσίπουρο, Tsipouro라는 전통 증류주인데 그리스에선 집집마다 담가 마신다고 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와인을 만들고 남은 부산물―marc라고 한다―로 만든 술이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브랜디인 셈이다. 우리에게 맛보라고 내준 건 룸파스네서 직접 담근 치포로였다.

위스키나 브랜디를 좋아하는 내 입맛에 맞았고, 애주가이신 아빠도 좋아하셨다. 우리가 맘에 들어하자 룸파스는 다시 창고로 가 두 병을 새로 담아와 건넸다.

clear라고 쓰인 쪽이 물론 아니스가 들어가지 않은 쪽이다

둘 중 하나는 어떤 향신료가 들어간 것이라고 소개했다. 흔히 그리스 술이라고 하면 우조ούζο,Ouzo라는 식전주가 가장 유명하다. 이 술은 무엇보다 그 특유의 향으로 유명한데 아니스Anise라는 향신료가 들어가서 그렇다고 한다. 아마 룸파스가 넣었다는 향신료도 이 아니스인 것 같았다. 나중에 마셔본 우조와 향이 비슷했거든.

그날 저녁에 반주로 내놓았는데 술을 그리 즐기지 않는 엄마나 조과장에겐 독했던 모양이다(40도쯤 한다). 그리고 아니스가 들어간 쪽은 누구의 입맛에도 맞지 않았다…ㅎㅎ

(계속)